[정원석의 매크로리뷰 <21> “대미 흑자국 외환보유액, 美 일자리 줄인다”는 미란 보고서] ‘마러라고 합의’ 현실화하는 트럼프 관세 협상…日 합의, 韓 난항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9월 16일(이하 현지시각) 일본산 자동차 관세를 15%로인하하면서 현대자동차 쏘나타와 토요타 캠리 가격이 뒤집힐 전망이다. 현재 미국 현지 판매 가격은 소나타가 2만8145달러로, 캠리(2만9895달러)보다 약 1750달러 저렴하다. 그러나 일본차 관세 인하 효과가 본격 반영되면 쏘나타가 캠리보다 1000달러 이상 비싸진다. 한국산 자동차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그간 무관세 혜택을 누렸지만, 지난 4월부터 25% 고율 관세를 적용받고 있다. 반면 일본은 트럼프 대통령(이하 트럼프) 요구에 따라 5500억달러(약 764조5000억원) 규모의 대미(對美) 현금 투자에 합의하면서 관세 인하를 얻어냈다. 증권가에선 현재 수준 관세가 지속하면 현대차·기아가 월 7000억원대 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트럼프는 4월 2일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을 선언하며 국가별 상호 관세를 발표한 뒤, 개별 협상을 통해 각국의 양보를 끌어내고 있다. 중국은 9월 14~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고위급 무역 협상에서 미·중 갈등 사안이었던 중국 동영상 플랫폼 ‘틱톡’ 소유 구조를 미국의 통제를 받는 형태로 바꾸기로 합의했다. 일본은 투자 전용 특수목적법인(SPV) 계좌에 미국이 요청하면 45일 내 현금을 입금해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유럽연합(EU) 역시 2028년까지 6000억달러(약 834조원)를 미국의 전략산업에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한국도 지난 7월 말 미국에 3500억달러(약 486조5000억원)를 투자하는 조건으로 상호 관세와 자동차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했지만, 투자 방식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해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과 같은 현금 투자를 요구하지만, 한국은 간접 금융 지원 위주 방식이 현실적이라고 맞서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산 자동차 관세는 여전히25%에 묶여 있다. 한국이 투자 방식을 놓고 미국과 줄다리기를 이어가는 사이, 일본은 한발 앞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며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트럼프 관세 전략 출발점은 미란 보고서
트럼프는 고율 관세를 무기로 한국, 일본, EU 등 동맹국으로부터 수천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을 끌어내고 있다. EU와는 유럽 기업의 미국 내 투자 확약 수준에 그쳤지만, 한국과 일본에는 직접적인 현금 투자를 요구하는 모양새다. 양국이 보유한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 같은 트럼프 전략의 배경은 최근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신임 이사로 취임한 스티븐 미란(Stephen Miran) 백악관 국가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이 2024년 11월 발표한 ‘글로벌 무역 체계 재편을 위한 사용 설명서(일명 미란 보고서)’에 잘 드러나 있다.
미란 이사는 이 보고서에서 “대미 교역국의 외환보유액과 미국 일자리 사이에는 역(逆)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교역에서 경상수지 흑자가 쌓이면 당연히 자국 통화 가치는 절상돼야 하지만, 교역국은 이를 막기 위해 달러 자산을 대규모로 매입하며 외환보유액을 불린다. 그 결과 과도한 달러 강세로 미국의 무역 적자가 심화하고, 제조업 일자리는 줄어든다. 미란 보고서는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면 교역국 외환보유액을 줄이고, 대신 그 자금이 미국 내 투자와 고용으로 연결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래야 과도한 달러 강세가 제어되고 불균형이 시정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실제 협상 결과에도반영됐다. 9월 4일 체결된 미·일 합의문에 따르면, 트럼프가 승인한 투자 프로젝트에 자금을 투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외환보유액을 구성하는 미 국채 등 달러 자산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투자 분야를 반도체와 의약품·광물·에너지·인공지능(AI), 양자 컴퓨터 등 9개 투자 분야로 명시했으나, 어느 분야에 투자할지는 미국 몫으로 못박았다. 협약 이행 중 문제가 생기면 관세율을 25%로 올릴 수 있다는 조항도 있다. 당장 하워드 러트닉(Howard Lutnick) 미 상무 장관은 일본의 투자금이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등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에 투입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일본 내에서는 불평등 협약이라는 비판 여론이 적지 않다. 투자금 회수 전까지는 50%의 이익을 가져가지만, 대출금 상환 이후에는 이익 90%를 미국이 가져가는 구조 때문이다.
美 안보 우산과 연계한 협정 추진할 듯
이 같은 미국의 관세 협정에 대해 미란 보고서에 나온 ‘마러라고 합의(Mar-a-Lago Accord)’가 현실 경제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일본 노무라종합연구소의 키우치 노부히데 이코노미스트는 9월 17일 자사 블로그에 “트럼프가 달러 강세 기조를 시정하기 위한 구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관세정책에 이어 무역수지 적자 축소를 이끌기 위한 ‘미니 마러라고 합의’를 모색할 가능성이 있다”고 썼다. 그는 “일본과 한국 등이 타깃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마러라고 합의는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인위적 절상을 이끈 1985년 플라자합의를 본떠 현재의 달러 강세를 시정하는 새로운 다자간 통화 협정을 맺자는 제안이다. 대미 교역국이 외환보유액으로 쌓아놓은 미 국채를 100년 만기 무이자 채권으로 교환토록 하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됐다. 미란 보고서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세 가지 수단도 제시했다. 첫째는 고율 관세라는 채찍, 둘째는 미국의 방위 우산과 그것을 잃을 수 있다는 위험, 셋째는 통화 스와프 등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 수단이다.
실제로 미국 국방부는 한국, 일본과 관세 협상 중인 9월 초 △미국 본토 방어 역량 강화 △동맹국 방위비 확대 △방위산업 인프라 재활성화 등 새 국가 방위 전략 초안을 확정했다. 한국은 관세 협상 과정에서 미국에 연준의 무제한 통화 스와프를 제공해달라는 요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처럼 대규모 현금 투자를 수용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은 일본에 요구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3500억달러 대미 투자금 상당 부분을 현금으로 조달하라고 압박하고 있지만, 한국의 순대외금융자산은 2분기 말 기준 1조302억달러(약 1431조9780억원)로 일본(2024년 말 3조6200억달러)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외환보유액 역시 4162억달러(8월 말 기준)에 그친다. 이런 조건에서 외환보유액을 헐어 투자금을 마련할 경우, 연준과 통화 스와프가 없는 한국은 국가신용 등급 강등 등 국가 신인도에 심각한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크다.
Plus Point
트럼프 요구대로 빅 컷 투표한 미란…연준 독립성 논란 거세질 듯

미국 연준은 9월 17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열고, 기준금리를 연 4.00∼4.25%로 25bp(1bp= 0.01%포인트) 인하했다. 2024년 12월 이후 9개월 만의 인하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이날 금리 결정 후 기자회견에서 “좀 더 중립적인 정책 입장을 향해 또 다른 조처를 하는 게 적절하다”면서 올해 두 차례 더 금리를 내릴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날 FOMC에선 금리 결정보다 트럼프의 지명을 받아 연준 이사로 취임한 스티븐 미란 이사가 유일하게 50bp 금리 인하에 투표했다는 사실에 이목이 더 쏠렸다. FOMC를 앞두고 나온 트럼프의 ‘빅 컷(big cut·50bp 금리 인하)’ 요구를 연준에 대변한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미란을 통해 연준의 금리 결정에 대한 트럼프 개입이 강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중도 사임한 아드리아나 쿠글러 전 연준 이사 후임인 미란의 임기는 내년 1월까지지만, 트럼프가 후임자를 지명하지 않으면 계속 직위를 유지할 수 있다. 트럼프가 연준을 장악하기 위해 미란을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백악관 국가경제자문위원회 의장에서 사임하지 않은 미란은 역사상 최초로 다른 직위를 겸하는 연준 이사라는 논란을 일으켰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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