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미술관 산책 <26>] 르네상스 시대 라파엘로는 왜 인물화에 모자를 즐겨 그렸을까

정철훈 미술 칼럼니스트 2025. 9. 26. 12:5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 라파엘로,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 1515. 2 라파엘로, ‘교황 율리우스 2세 초상’, 1511~1512.3 라파엘로, ‘베일을 쓴 여인’, 1512~1516. 4 라파엘로, ‘자화상’, 1506년쯤. /사진 위키피디아

르네상스 3대 거장 중의 한 명인 라파엘로 산치오의 대표작 ‘아테네 학당(1511년쯤)’은 르네상스 시대의 지적 이상을 집약한 벽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같은 거인을 마주한다. 그러나 이 철학자들 사이로 특히 눈길을 끄는 한 인물이 보인다. 화면 오른쪽, 검은 모자를 쓴 젊은 화가의 얼굴, 바로 라파엘로 자신이다. 그는 철학자 사이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자신도 위대한 철학자의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그런데 왜 라팡엘로는 굳이 ‘모자를 쓴 모습’으로 자신을 등장시켰을까.

지적 상징을 나타내는 ‘검은 베레모’

라파엘로는 1515년, 귀족 출신 외교관이자 대표적 인문주의자였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을 그렸다.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단순한 인물 묘사를 넘어, 르네상스가 지향한 이상적 인간상을 담아낸 초상화로 유명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작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구도와 느낌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화면은 상반신을 중심으로 안정된 삼각형 구도로 짜여 있고, 두 손을 차분히 포개어 전면에 배치한 구도 역시 모나리자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또한 얼굴과 손에 드리운 부드러운 명암은 다빈치가 창안한 스푸마토 기법을 차용한 것으로, 카스틸리오네의 표정에 온화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인물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 처리 역시 모나리자의 ‘마음의 깊은 미소’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았다. 모나리자가 온화한 모성으로 관람자에게 전달되는 존재라면, 카스틸리오네의 초상은 오히려 지적 교양과 인간적 신뢰성을 보여준다. 모자의 차분한 선, 털옷의 절제된 질감, 담담한 시선은 ‘외양보다 덕성과 품위를 갖춰야 한다’는 카스틸리오네 내면의 사상을 그대로 시각화한 듯하다.

그 품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치가 바로 검은 모자다. 장식도, 화려함도 없는 이 베레모는 당시 지식인이 즐겨 쓰던 차림이었다. 화려한 갑옷이나 목걸이가 권력의 상징이었다면, 모자는 덕성과 절제를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라파엘로는 카스틸리오네의 모자를 통해 그가 어떤 품성의 사람인지를 나타내고 있다. ‘왜 르네상스 시기 초상화에 모자가 즐겨 등장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과 인문적 품위를 담아내는 표식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철훈-미술 칼럼니스트,문화기획 프로듀서,전 KBS아트비전 대표52-

영적 권위를 나타내는 교황의 ‘자주색 모자’

라파엘로의 ‘교황 율리우스 2세 초상(1511~1512)’은 권위 있는 군주의 이미지라기보다, 책임의 무게를 짊어진 인간적인 교황의 얼굴을 보여준다. 화면을 가득 메운 녹색 커튼, 금빛으로 장식된 의자 그리고 침묵 속에 앉아 있는 교황의 모습은 단순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 머리에 쓴 자주색 모자는 카마우로(camauro)라 불린다. 교황이 겨울철에 쓰던 자주색 벨벳 모자로, 가장자리는 흰 모피로 장식했다. 교황관처럼 의례적이고 화려한 장식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소박함이 강렬하다. 자주색은 희생과 헌신,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고, 흰 모피는 정결과 절제를 뜻한다. 작은 모자 하나에 교황의 권위와 영적 영성이 응축된 것이다.

라파엘로는 이 작품에서 색채와 붓질로 이 의미를 더 강조했다. 녹색 배경과 대비되는 자주색 모자는 인물의 얼굴과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고, 부드럽게 번지는 붓질은 교황의 지친 눈빛과 주름진 피부를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교황의 고뇌와 인간적 약함까지 담아낸 심리적 초상으로 읽힌다.

앞에서 언급한 카스틸리오네의 검은 모자가 인문주의적 품위와 절제를 드러냈다면,율리우스 2세의 자주색 모자는 영적 권위와 희생을 상징한다. 서로 다른 색과 재질이지만, 라파엘로는 모자를 통해 인물의 내면과 시대정신을 압축해 전달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시기 초상화의 모자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인물을 해석하는 열쇠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11년쯤. /사진 위키피디아

여성의 정숙과 품위를 상징하는 ‘흰색 베일’

라파엘로는 여성의 머리에는 모자 대신 베일을 통해 여성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베일을 쓴 여인(La donna velata·1512~1516)’은 라파엘로의 결혼 전 연인을 그린 작품이다. 이 초상 속 여인은 정교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얇게 드리운 베일을 걸쳤다. 이 베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여성의 표식이자 정숙과 품위를 상징하는 장치였다. 화려한 비단옷과 보석 장식이 사회적 지위를 드러냈다면, 베일은 오히려 정숙과 도덕적 덕목을 강조한다. 라파엘로는 이 베일을 극도로 세밀하게 묘사했다. 투명한 천의 결,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방식, 빛을 머금은 질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단순한 패션을 넘어선 의미를 느끼게 한다.

남성이 모자를 통해 교양과 권위를 드러냈다면, 여성은 베일을 통해 정숙과 가정적 덕목을 시각화했다. 이것은 당시 르네상스 사회가 남녀에게 부여했던 역할과 덕목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끊임없는 구별 짓기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에서 자신을 검은 베레모를 쓴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단순한 취향이나 유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 모자가 지녔던 상징성과 권위를 드러내는 장치였다. 르네상스 시대, 모자와 베일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신분·도덕·사회적 역할을 전달하는 기호였다. ‘누가 누구인지, 어떤 책임을 지닌 사람인지’가 시각적으로 읽히던 시대였다. 이런 이유로 라파엘로는 초상화에서 남성의 모자나 여성의 베일을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인물의 정체성을 압축해 드러내는 요소로 세밀하게 표현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신분의 표현으로 검은 베레모나 흰색 베일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명함의 직함, 브랜드 로고, 장신구 같은 물질적 표식은 여전히 새로운 ‘모자’가 되어 정체성과 지위를 규정한다. 부르디외가 지적했듯, 이는 상징적 자본을 통한 끊임없는 구별 짓기다.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