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재난은 예방 가능” 27년 현장 경험의 증언 [.txt]
세월호·이태원 참사와 겹쳐 읽히는 울림
미래 안심하고 맞이할 때, 진정한 재난 복구

영국의 재난 복구 전문가 루시 이스트호프는 1978년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1989년 4월15일 셰필드의 힐스버러 경기장에서 열린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축구 경기 도중 100명 가까운 관중이 숨지는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던 그의 아버지는 “누구든 해결을 해야지”라며 울분에 차 고함을 질렀다. 그 말이 루시의 삶의 지침이 되었다. 대학생이던 1999년 재난 지원 및 유가족 권익 모임 ‘디재스터 액션’(재난 행동)을 만난 이래 그는 사반세기 남짓 재난 관련 비상 계획 수립과 재난 발생 뒤 사후 처리 및 복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먼지가 가라앉은 뒤’는 그가 영국과 세계 곳곳의 재난 현장을 누비며 보고 겪은 일들을 중심으로 재난 복구의 세계를 알려주는 책이다. 대학원 시절 케니언 인터내셔널 응급 서비스라는 민간 기업에서 재난 분야 경력을 시작한 그는 9·11 테러,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이라크 전쟁, 2005년 런던 지하철 테러, 후쿠시마 원전 사고, 2017년 런던 그렌펠타워 화재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을 비롯해 홍수와 열차 폭발, 항공기 피격, 밀입국 집단 질식사 등 굵직한 재난들의 뒤처리를 맡았다. 책에는 이런 재난들에서 그가 펼친 복구 활동과 함께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두 딸을 낳아 키우는 개인사가 담겨 있다.
비행기가 도로에 추락해 인명 피해를 낳은 사고 현장을 묘사한 프롤로그는 지난 연말 무안공항의 제주항공 사고를 떠오르게 한다. 이어지는 제1장에서 200명 넘는 인명을 앗아간 페리호 침몰 사고 묘사는 어쩔 수 없이 세월호를 연상시키고, 앞서 소개한 힐스버러 사고는 이태원 참사로 생각을 몰아간다. 그렇다는 것은 비슷한 재난이 시·공간을 오가며 거듭해서 일어난다는 뜻이고, “재난 현장과 그 밖의 세상은 말 그대로 종이 한장 차이”일 뿐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렌펠타워 화재 당시 “불길이 건물을 집어삼키고 아파트 내부가 연기로 가득 차는데도 주민들은 ‘그대로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대목에서는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의 무지와 무책임, 그리고 지난 사태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게으름에 탄식이 터져 나온다.
대규모 재난이 발생했을 때 민간 재난 복구 전문가로서 지은이가 하는 일은 “재난 조사를 돕고, 시신 안치소를 짓고, 신원 확인과 매장, 유류품 및 시신 송환을 감독”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차적 대응이 끝난 뒤 “더 장기적인 복구를 해내는 것”이 지은이의 주력 분야다. “피해를 당한 지역사회가 앞으로 한발짝 더 나아가게끔 이끌고, 재난 후의 미래를 안심하고 맞이하”도록 돕는 게 진정한 재난 복구라고 그는 강조한다.
지은이는 1989년 런던 템스강 유람선 마셔니스호 충돌 사고와 관련해 2001년에 나온 보고서에서 내놓은 원칙을 재난 대응의 지침으로 삼는다. ‘모든 시점, 모든 단계에서 가능한 한 정확하고 정직한 정보 제공/ 사망자와 유가족에 대한 존중/ 전반적으로 공감하고 배려하는 태도/ 잘못된 신원 확인 방지’가 그 원칙들이다.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롭고, 그 때문에 더욱 주의와 노력을 요한다. 9·11 테러 당시 “시신 부위들은 열과 압력에 의해, 나중엔 물에 의해 속성이 달라졌다. 많은 사망자가 아주 작은 시신 조각으로만 돌아왔고 일부는 아예 돌아오지 못했다. (…) 사망자 명단에 오른 사람의 40퍼센트는 여전히 그들의 죽음을 물리적으로 입증해 줄 유해가 나오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경험 범주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의 이야기인 만큼 흔히 접하기 어려운 용어와 표현들이 눈길을 끈다. 가령 재난 애도의 위계라는 것이 있다. “슬픔의 물결은 널리 퍼져나가지만, 바깥쪽 원에 위치한 사람들은 슬픔을 느낄 자격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가리킨다. ‘회복 경청’은 어떤가. “입을 다물고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회복 경청이다. ‘기억 상자’라는 것도 있다. 사망자가 남긴 몇 안 되는 유품을 담아 유족에게 건네주는 상자다. 9·11 테러 당시 사망자의 어머니는 아들이 그날 아침으로 먹은 커피와 크루아상을 구매한 영수증을 받아 들고 “약간이나마 위안을 얻었다.”
재난 대응과 복구의 대원칙은 철저히 사망자와 유족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가 사망자의 이름을 되찾아주는 것이다.” 지은이는 또한 자신이, “유가족이 시신을 보고 사망자에게 작별을 고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워왔다”고 소개한다. 가령 마셔니스호 사고 희생자 션 록우드크로프트의 어머니는 관에 담겨 땅에 묻은 아들의 주검이 바뀌었다고 믿고 지금까지도 “관을 땅에서 파내서 열어보기 위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런 유족들뿐만 아니라 대형 재난을 겪은 지역사회의 구성원들의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한편 또다시 닥칠지 모를 재난에 대비하도록 체계를 정비하는 일에도 지은이는 매진하고 있다. “재난이 지나간 뒤야말로 폐허를 재건하고 기회를 찾아낼 가장 좋은 시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홍수나 지진처럼 지질학적 원인에서 비롯된 재난이라 할지라도 ‘자연재해’라 부르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 재난의 원인은 자연에 있을지라도 “합병증을 만드는 건 인간의 오류와 인간의 약함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잘못으로 비롯된 재해는 물론 자연적 원인을 지닌 것까지 포함해서 “모두 예방 가능한 재난들이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극심한 열감과 오한, 구토, 호흡 곤란 등의 증상으로 코로나19를 일찌감치 겪은 지은이는 코로나 팬데믹을 거쳐 왔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제 모두 재난 생존자들”이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생존자의 죄책감’으로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이뤄진 변화”에 감사하며 유가족의 상처를 다독이는 한편,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 그 일 아닐까. “고통도 계속되겠지만 회복도 계속될”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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