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력 낙원 에스토니아, ‘재생에너지 100%’ 정책 버리고 원전 택했다
지난 17일(현지 시각)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 있는 원전 업체 페르미 에네르지아(Fermi Energia) 사무실. 에스토니아 북부 해안 두 곳에 설치될 SMR(소형 모듈 원자로) 모형이 전시돼 있었다. 칼레브 칼레메츠 CEO는 “에스토니아는 풍력에 강점이 있지만 원전 없는 재생에너지는 한계가 뚜렷하다”며 “국민의 70%가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원전이 필요하다고 찬성해 원전 추진이 결정됐다”고 했다.
에스토니아는 2023년 7월 환경부 ‘기후’와 경제부 ‘에너지’ 기능을 묶어 ‘기후에너지부’를 신설했다. 러·우 전쟁으로 발생한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에너지 안보’ 위기를 타개하고, 2050년 탄소 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부처 간 분산돼 있던 기능을 하나로 모아 효율성을 높인다는 취지였다. 기후부 출범 1년 전에는 2030년까지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계획이 의회에서 결정됐다.



그러나 에스토니아 정부가 ‘재생에너지 100%’의 환상에서 벗어나는 덴 기후부 출범 후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에스토니아 국회는 작년 6월 ‘핵에너지 도입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자국 내 첫 원전 설치의 길을 열었다. 올 7월에는 정부 차원의 SMR 도입 적합성 조사를 거쳐 설치가 확정됐다.재생에너지 간헐성과 기저 전원(24시간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는 발전원)의 부재로는 탄소 중립도, 에너지 안보도 불확실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초 에스토니아가 한때 비율이 90%에 달했던 화석연료인‘오일 셰일’과 결별하고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로 전력 100%를 채운다는 도전적 목표를 세운 것은 ‘제2의 덴마크’라 불릴 정도로 국토 지형이 풍력에 강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광은 에스토니아 위도가 59도로 높아 여름엔 해가 18시간이나 떠 효율이 좋았으나, 겨울에는 일조량이 적어 발전량이 미미했다. 이에 풍력이 중심이 되고, 태양광이 보조 에너지원이 되는 재생에너지 사회를 설계한 것이다. 2022년 3월 정부는 태양광, 풍력, BESS(대형 배터리 저장 시스템)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파크’를 착공, 이듬해 6월 ‘세계 풍력의 날’ 공식 개장했다.
재생에너지는 빠른 속도로 확대됐지만 문제는 ‘기저 전원’이었다. 유럽에선 영국이 인근 해상에 조성한 시그린(Seagreen) 등 대규모 풍력 단지에서 바람이 잘 불지 않는 문제가 발생해 전력 생산량이 기대치를 밑도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장학금을 받고 스웨덴에서 원자력공학을 배우고 온 에스토니아 출신 유학생들이 자국으로 돌아와 원전 관련 비정부기구(NGO)를 설립하고 정부에 원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내고 있었다. 이에 정부가 기저 전원으로서 원전의 가능성을 살펴보게 됐다.
에스토니아가 대형 원전이 아닌 SMR을 택한 것은 자국 규모를 고려한 것이다. 에스토니아는 면적 4만5227㎢(남한의 45%), 인구 134만명인 ‘작은 나라’인 데다 한국처럼 에너지 집약형 산업이 없다. 이에 막대한 투자금이 들어가고 ‘과잉 전력’ 문제를 낳을 수 있는 대형 원전보다는 SMR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국민 여론조사 등을 거쳐 원전 도입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 다만 에스토니아는 원전과 관련한 자체 기술이 없기에 미국·일본 합작사인 GE 히타치가 개발 중인 차세대 SMR 2기를 2035년까지 도입하기로 했다.
에스토니아 기후부를 디자인한 요코 알렌더 전 기후부 장관은 본지에 “에스토니아는 ‘에너지’ ‘안보’ ‘청정’을 3대 축으로 하는 실용주의를 정부 정책의 핵심 기조로 삼고 있다”며 “이 세 가치의 최적화된 균형을 맞추는 일이 에스토니아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재생에너지도, 원전도 모두 중요한 에너지원이며, 그 비율은 현실에 맞게 합리적으로 계획을 다듬어갈 계획”이라고 했다.
한국도 내달 기후, 에너지, 치수(治水) 기능을 총괄하는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출범한다. 그러나 재생에너지 생산에 한국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진 에스토니아가 먼 미래를 보고 원전 기술과 에너지 믹스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 한국은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재명 정부가 재생에너지 확대를 강조하면서도, 김성환 환경부 장관이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포함됐던 신규 원전 계획에 대해 “공론화하겠다”는 입장을 내는 등 원전 생태계의 성장을 억제해 사실상 ‘제2의 탈원전’ 사태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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