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김규식과 그의 시대 (하)

김진형 2025. 9. 2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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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1일 3·1 운동이 벌어지기 직전 김규식은 여운형이 주도한 상해 신한청년당의 대표 자격으로 파리로 떠났다.

김규식은 단기필마 1인 외교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통신국을 설립하고 전 세계에 자주독립의 목소리를 외쳤다.

김규식은 파리로 가기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했다.

상해에서 포르토스 호를 타고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그는 맹렬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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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도 강인한 1인 외교 투쟁…파리서 자주독립을 외치다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통신국 설립
3·1운동 불씨…언론보도 확산
일본 탄압·임시정부 활동 전해

1919년 2월 1일 3·1 운동이 벌어지기 직전 김규식은 여운형이 주도한 상해 신한청년당의 대표 자격으로 파리로 떠났다. 김규식의 일생 중 가장 빛나는 시기이자, 그가 한국근현대사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한 시기였다. 김규식은 단기필마 1인 외교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통신국을 설립하고 전 세계에 자주독립의 목소리를 외쳤다.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평전 ‘김규식과 그의 시대’ 2권을 통해 1919년부터 3년간 김규식의 행적을 다뤘다.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대두되던 시기, 파리강화회의는 당대 독립운동 주체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목표지점이자 폭발력을 키우는 방아쇠였다. 김규식은 파리로 가기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했다. 김규식은 과연 파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 본지는 김규식의 행적을 찾고자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20분간 걸어 내려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1919~1920·파리 제9구 샤도텅가 38번지)가 보였다. 현재 이곳에는 현판만 있을 뿐 별도 기념시설이 조성돼 있지는 않다.

▲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옛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 김진형 기자

“부디 평화회의가 우리 대표를 만나 자유의지에 반해 일본의 속국이 된 한국 상황을 명확히 청취해 주길 바란다.한국인들은 자신들을 다시 한 번 자유롭고 독립된 민족으로 만들어 줄 국가 권리에 내재하는 정의를 확신한다.”

김규식이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의 내용이다. 상해에서 포르토스 호를 타고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그는 맹렬하게 움직였다. 각국 기자, 재야인사, 프랑스 언론, 의원들과 접촉했으며 2통의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다.

땅끝에서 땅끝까지 간 외교는 외로웠다.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한국의 독립된다는 가능성도 낮았다. 대표적으로 윤치호는 파리강화회의의 적격자로 많은 사람의 권유를 받았지만 독립운동을 냉소적인 태도로 비난하는 데 그쳤다. 1차 세계대전 당사국 승패 문제만 해결한 파리강화회의는 한국 문제를 의제로 상정하지 않았다. 한국을 바라보는 강대국의 공식 입장이었다.

“경애하는 동포여! 분발하여 오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우리의 나중 핏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우리의 나중 한 사람이 거꾸러질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독립을 위하여 쉬지 말고 낙심도 말고 혈전을 계속합니다.”

4월 30일 국민회 중앙총회에 전달된 김규식의 편지다. 그는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임시정부 파리위원회’를 만들고 한국통신국을 세워 ‘통신전’을 발행, 다양한 프랑스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일본의 잔혹한 탄압, 상해 임시정부 활동 등의 내용을 전했던 사실상의 1인 외교 투쟁이었다. 파리통신국에서 수집한 통계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 말까지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에 한국 문제가 소개된 신문 종수 및 횟수는 총 181종 517회에 달했다. 실제 보도된 사례는 통계의 수십 배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옛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 김진형 기자

8월 8일 파리를 떠난 김규식의 외교는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하지만 천도교 등 조선인들의 지원을 받았기에 그의 행동은 멈출 수 없었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투쟁이었다. 1920~1921년 미국에서 구미위원부 활동을 하다 뇌종양 수술을 받고 가까스로 회복하기도 한다.

저자는 윤치호와 김규식의 사례를 들어 “역사의 파도가 밀려올 때 어떤 이는 수수방관하고 비난하는 태도를 취한 반면, 다른 어떤 이는 적극적 행동을 취함으로써 자신과 민족의 운명을 바꿨다. 시대와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 배신자가 될 것인가는 스스로가 선택한 자신의 운명이었다”고 했다.

프랑스 파리/김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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