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29. 동해 초록봉:초록봉이 초록색일 때 오르는 기쁨
동해 천곡동 위치 해발 531m ‘초록봉’
한자 뜻 ‘풀의 기록’ 낭만적 이름 눈길
등산로 입구에서 정상까지 약 3㎞
초반 경사진 오르막에 비지땀 흘러
출발 후 1시간 정도 지나 정상 도착
묵호·동해항 품은 푸른 바다 펼쳐져
‘동해 8경’ 타이틀에 맞는 풍경 만끽

서울에서 강원도로 내려와 살면서 좋은 점은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동해를 보러 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같은 바다여도 동해는 서해나 남해와는 사뭇 다른 정취가 있습니다. 우선 동해 하면 섬뜩할 정도로 파랗다 못해 시커먼 물빛이 떠오릅니다. 어렸을 때 동생들과 부모님을 따라 속초나 강릉으로 바다를 보러 갈 때면 세차게 파도치는 바다 앞에서 두려워 떨던 기억이 납니다. 저 멀리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저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했던 기억도 납니다.
‘이맘때면 바다를 한 번 볼 때가 됐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시점이 있는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요즘이 그렇습니다. 한층 선선해진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바다처럼 창창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바다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동해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 동해로 향하는 버스에 오릅니다.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동해안의 남부 도시. 1980년 4월 1일 강릉시(명주군) 묵호읍과 삼척시(삼척군) 북평읍을 통합해 출범한 신생 항구도시. 그리고 지역 이름이 바다와 같은 도시.

지난 6월부터 원주에서 동해로 가는 직행버스 노선이 생겨 동해 가는 길이 한결 더 수월해졌습니다. 산을 오르기 위해 동해로 향하기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2년 전 가을이 깊어갈 무렵에 동해의 명산 두타산과 청옥산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시간 속에 멈춰 있는 두타산과 청옥산의 풍경은 마치 선계의 그 무엇을 닮아 있어서 산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이생과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홀린 듯 거닐다 결국은 하산해야 할 시점을 놓쳐 석양이 땅속으로 사라졌을 때 겨우 산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두타산과 청옥산은 동해를 대표하는 천고지 명산이지만 두 산에서는 바다를 볼 수 없습니다. 폐부에 유서 깊은 무릉계곡을 안고 있기에 바다가 그다지 아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바다를 볼 수 있는 동해의 산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이름도 동화처럼 상냥하고 어여쁜 ‘초록봉(草錄峰)’입니다. 초록봉은 동해시 천곡동에 솟은 해발 531m의 산입니다. 한자를 살펴보니 ‘풀 초(草)’ 자에 ‘기록할 록(錄)’ 자를 씁니다. 풀의 기록이라, 낭만적인 이름입니다.
버스에서 하차해 터미널 내 편의점에서 물과 간식을 구한 뒤 오전 10시, 초록봉을 찾아갑니다. 초록봉 들머리 부근의 묵호고등학교는 동해시종합버스터미널에서 겨우 1.8㎞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오후의 비 예보가 믿기지 않게 날씨가 청량합니다. 산행지를 찾아가는 길에 둘러보는 민가의 모습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울타리 없는 텃밭의 고추는 붉게 익었는데 대추나무의 대추는 이제 막 달린 것처럼 싱싱합니다. 감나무의 감도 단감으로 익으려면 아마 한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네요. 문득 홍시를 좋아하는 얼굴들이 나무 위로 스쳐 지나갑니다.
주변을 두런두런 둘러보며 걸어가니 어느덧 초록봉 등산로 앞입니다. 이 산의 세월만큼 검붉게 녹이 슨 등산 안내도가 이내 발길을 산속으로 이끕니다. 입구에서 초록봉 정상까지는 약 3㎞입니다. 초반부터 경사진 오르막입니다. 신발끈을 야무지게 다시 묶고 배낭의 가슴끈을 바짝 조이며 산길을 오릅니다. 출발한 지 5분도 안 돼서 이마와 등에 비지땀이 흐릅니다. 비교적 낮은 고도와 순한 이름 때문에 가볍게 봤는데 만만치 않은 산행입니다. 이 산은 가을은 기약 없고 아직 한참 무더운 여름입니다.
당일치기로 홀로 찾은 타지의 산을 오를 때면 오며 가는 길에 만나는 등산객이 까닭 없이 반갑습니다. 안녕하시냐는 인사와 함께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에게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어디까지 갈 것이냐고 묻습니다.
초록봉 정상 가는 길에도 중간중간 사람들을 만납니다. 옷차림을 보아 모두 근방에 사는 주민 같습니다. 한 사람은 웰빙레포츠타운 쪽에서 올라왔다고 하네요. 누군가에게는 낯선 미지의 산이 누군가에게는 편하고 익숙한 뒷산입니다.
출발한 지 넉넉히 1시간 정도 지나 초록봉 정상에 이릅니다. 정상에 오르자마자 두 팔 벌려 맞이하는 것은 기대했던 대로 파란 바다입니다. 초록색 융단 같은 숲이 발아래로 굽이굽이 펼쳐지다가 숨을 거두는 곳에 바다는 드넓은 평화처럼 펼쳐집니다. 과연 동해 8경답습니다.

두 개의 항구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북쪽에 있는 항구는 묵호항일 것이고, 남쪽에 있는 항구는 동해항일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도 묵호항 근처에 동해의 명물 논골담길, 도째비골, 연필박물관 등이 아기자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정상에서 멍하니 동해를 바라보는데 문득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인 2005년, 한 기업의 전국 대학생 탐방 프로그램을 통해 묵호항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난번 두타산과 청옥산에 다녀오던 날 묵호항과 인근 수산시장에 들렀을 때만 해도 나에게 그러한 추억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물러나 먼발치에서야 볼 수 있고 보이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이제 대부분의 일은 정말 나에게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 생경하기만 합니다.
초록봉의 정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찾지 못했으나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두 눈에 온전히 들어오는 초록빛 산세를 보는 것만으로 이 산의 이름이 왜 초록봉인지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아직 가을이 오기 전에, 초록봉이 물들기 전에, 그러니까 초록봉이 초록봉일 때 이 산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어느 순간 주변이 온통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일들뿐이라서, 어리석은 반성과 후회로 점철된 날들을 통과하고 있어서, 무언가를 우연하게도 제 때에 찾아왔다는 사실이 새삼 눈물겹게 고맙습니다. 작가·에디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초록봉 #초록색 #장보영 #두타산 #청옥산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진종오 “경기용 실탄 3만발 불법거래 정황… 행방 공개해야” - 강원도민일보
- 美 H-1B비자 수수료 ‘1억4000만원’ 대폭 인상…기존 100배 부과 - 강원도민일보
- 트럼프 “임신 중 타이레놀 복용 아기 ‘자폐 위험’ 통보할 것” - 강원도민일보
- ‘대왕고래’ 시추 안한다...동해가스전 2차 시추 외국기업 복수입찰 - 강원도민일보
- [속보] 트리플 태풍 ‘미탁·너구리·라가사’ 온다… 한반도 영향은? - 강원도민일보
- ‘청록 vs 노랑’ 눈치보는 공무원 - 강원도민일보
- 국내 쇼핑몰서 ‘귀멸의 칼날’ 욱일기 문양 상품 판매 논란 - 강원도민일보
- "먹어도 만져도 안됩니다" 복어 독 20배 ‘날개쥐치’ 주의 - 강원도민일보
- 제1188회 로또 1등 24명 ‘무더기 당첨’…인천·여주 한 판매점서 각각 5게임씩 1등 중복 당첨 화
- 정부 9·7 부동산 공급 대책 발표... ‘미분양’ 넘치는 비수도권은? - 강원도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