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도시에서 ‘역사’와 ‘재생’이 잘못 만나면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2025. 9. 25.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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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길 역사 재생은
국수주의 사관에 빠져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해
성공, 좌절, 시행착오를
사실 그대로 알려야
역사에서 배울 수 있다
서울 중구 정동길의 야경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가을바람 소슬한 이맘때 생각나는 곳 가운데 하나는 덕수궁 돌담길이다. 요새는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 경의선 숲길 등을 패러디한 동네 길이 도처에 널려 있지만, 그래도 덕수궁 돌담길에는 무언가 독보적인 아우라가 있다. 원래 궁궐 담장 옆 산책로였던 이 길은 1999년 서울시가 정동길을 ‘걷고 싶은 거리’ 1호로 공식 지정하면서 그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 붙은 말은 아직도 압도적으로 덕수궁 돌담길이다.

지난 몇 년 사이 덕수궁 돌담길 주변 모습이 확연히 달라졌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마치 ‘어두운 등잔 밑’ 같았던 정동 일대가 인파가 넘치는 ‘핫플’로 거듭난 것이다. 무엇보다 박원순 시정(市政)의 대표 브랜드인 도시 재생 사업 덕분이다. 도시 재생에는 다양한 수법이 있는데, 유독 정동 지역에는 역사를 자원으로 활용하는 전략이 구사되었다. 이곳에서 도시 재생과 역사 재생이라는 말이 혼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역사 명소’가 새로 단장되었고 ‘역사 보행’ 네트워크도 크게 늘었다. 그곳 부동산 시장에서는 왕조 시대의 추억을 프리미엄 요소로 삼는 ‘궁(宮)세권’까지 형성되고 있다.

‘역사’와 ‘재생’의 만남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구의 경우 도시 재생 사업에서 주로 쓰이는 것은 건축 문화 유산이 아니라 공장이나 창고 같은 산업 유산이다. 그런 만큼 덕수궁 같은 국가지정문화재가 포함된 정동의 사례는 꽤 이례적이다. ‘정동 대한(大韓),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라는 슬로건이 대변하듯 정동 일대 도시 재생 사업이 말하는 역사는 대한제국기다. 사업 초기 서울시 관계자는 덕수궁 돌담길 정도로만 기억되던 정동 일대의 정체성 전환을 강조했는데, 그곳을 이른바 ‘자주적 근대화’의 성지로 재정립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가 간다. 영국,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 열강들의 공사관이 밀집했을 뿐 아니라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 같은 근대 교육 기관과 정동교회나 성공회 성당 등 서양 종교 시설이 처음 들어선 곳이 정동이기 때문이다. 독립신문사도 그곳에 있었고 서양식 근대 병원인 제중원도 거기에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붉은색 벽돌 건물이 상징하는 근대적 도시 경관이 최초로 형성된 곳이 바로 정동 일대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대한제국의 ‘개혁 군주’ 고종이 염원한 ‘자주독립 국가’의 결정적인 징표는 아니다. 제국주의 시대 서양에서 이식된 역사적 형적(形跡)일 뿐, 고종의 적극적인 치적이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고종 자신의 무능과 실정(失政) 또한 가볍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는 국권 상실과 더불어 실패로 귀결하고 말았다. 그런 만큼 지금처럼 역사를 소재화(素材化)하여 볼거리나 놀거리를 앞세우는 방식의 도시 재생 사업은 그 시대 정동 일대 특유의 토포스(topos), 곧 장소의 인문학적 의미를 제대로 재생하지 못한다. 근대화를 둘러싼 당대 사람들의 고뇌와 사유 세계가 공간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 땅에서 진행된 ‘근대화의 길’과 관련하여 정동 일대만 특권화될 이유는 없다. 실제 역사로 말하자면 ‘정동 근대화’ 이외에 ‘신촌 근대화’도 있었고 ‘낙산 근대화’도 있었다. 만약 정동을 ‘자주적 근대화’의 공간적 상징이라 주장한다면 신촌은 기독교에 바탕을 둔 ‘서구식 근대화’의 요람이었다. 그곳에는 미션계 고등 교육 기관으로 선진 문물이 직수입되었고 경의선 개통 이후 철도역을 중심으로 근대 상업 문화가 번성하기도 했다. 한편, 낙산 아래 동숭동이나 혜화동 쪽은 ‘식민지 근대화’의 정신적 산실이었다. 제국대학이 자리 잡았으며, 관립 근대 의학 및 의료 기관도 들어섰다. 그 이면에서 근대 문화 및 예술이 싹튼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국수주의 사관에 빠져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리고 싶은 것만 알리겠다는 발상으로는 우리 역사를 다양하게 이해하거나 풍성하게 경험하지 못한다. 성공과 좌절, 시행착오가 가득한 역사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교훈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어두운 역사라도 반면교사는 될 수 있다. 더욱이 역사를 끌어들이는 도시 재생 방식에 관변 건축가나 도시 계획 업자들이 별다른 생각 없이 동참하다 보면 세계적 ‘역사 도시’ 서울의 이름값을 우리 스스로 지우기 십상이다. 언필칭 ‘유구한 역사’가 힘이 되고 약이 되려면 그것이 공간에 남긴 모든 자취를 사실 그대로 보존하고 기억하는 게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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