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용어 투쟁할 시간에 일자리를

택배 물류센터 신참이 넘어야 할 벽은 세 가지였다. 고성, 감시, 속도.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는 소리에 묻히지 않으려면 고성이 기본이고, 사방의 CCTV가 지켜보며 “쉬지 말라” 방송을 한다. 민첩하지 않으면 빨리빨리 움직이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지난 주말, 경기도의 한 택배 물류센터에서 알바를 하며 여실히 느꼈다.
첫 번째 주어진 일은 컨베이어를 타고 밀려드는 택배를 카트에 분류해 옮기는 일이었다. 집 앞에 놓여 있을 땐 몰랐는데, 택배 무게는 참 사악했다. 특히 압축 포장한 매트리스와 생수 묶음이 그랬다. 익숙해질 만하면 다른 구역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나를 포함한 신참들은 빨간 조끼 입은 선배를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그 뒤로도 카트를 끌고 차량 앞으로 보내는 일, 택배 팔레트를 5층으로 쌓는 일을 했다. 세 시간은 족히 흐른 것 같은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40분도 지나지 않아 절망스러웠다.
반나절도 안 돼 손목이 시큰했지만 이 알바에 청년들이 몰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4시간 30분 동안 일하고 통장에 꽂힌 돈은 10만5205원이었다. 올해 최저 시급이 1만30원인데, 시간당 2만3000원 넘게 받는 셈이었다. 또 근로계약서는 필수로 쓰는 데다 경쟁률이 낮아 진입 장벽도 낮고, 일당 못 받을 걱정도 없었다. 이날 만난 동료들 중 50대로 보이는 남녀 네다섯 명을 제외하면, 20여 명이 전부 20~30대로 보였다.
반나절 일당치곤 높은 액수였지만, 만약 이 벌이로만 삶을 이어가야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엔 ‘입사 지원금(5만원)’ ‘교육비(1만210원)’가 포함돼 있었다. 친구와 함께 오면 보너스 금액을 주고, 첫 근무자를 위한 특별 보너스 행사도 자주 열린다. 전날 밤 신청해 바로 일할 수 있는 알바 중 가장 매력적인 곳이긴 하지만, 매번 이 금액을 받는 건 아니었다. 이 일만으로 청년들이 내일을 설계할 수 있는 수준까진 못 되는 것이다.
직장을 가지기 전까지는 이런 단기 알바를 할 수밖에 없는데, 첫 취업 연령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1998년 대졸 신입 사원의 평균 나이는 25.1세였다. 2020년 31세로 뛰었으니 최근엔 더 올랐을 것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작년 20~34세 청년들의 28.4%가 단기·시간제 아르바이트 경험을 갖고 있다. 이들 중 40% 가까이가 월평균 소득 100만원 미만이다. “젊고 몸 건강하니 알바라도 해라” 쉽게 말하지만, 누군가에겐 나이 들고 몸 성하지 않을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다.
얼마 전 노동과 근로 용어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또 수면 위로 올랐다. 보수 진영은 근로를, 진보 진영은 노동을 선호해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립해 왔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꾸는 법안을 추진했고 고용노동부 장관은 부처 약칭을 고용부가 아닌 노동부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근로와 노동이 대립하는 사이, ‘잠깐 하는 일’ ‘경험 삼아 하는 일’ 취급을 받아 온 알바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어느 정부든 용어 투쟁에 힘쓸 게 아니라, 하루를 버티는 일 대신 내일을 설계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드는 데 써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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