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30년 친구의 감정학 [이지영의K컬처여행]

2025. 9. 25.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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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은 첫회부터 믿음이 가는 작품이다.

배우 김고은과 박지현은 시간의 결을 얼굴과 몸짓에 새겨 넣고, 대본은 감정의 골을 비껴가지 않으며, 연출은 사건보다 표정과 침묵을 오래 붙잡는다.

그들의 시간이 흐를수록 표정의 농도와 말의 무게가 변하고, 두 사람의 호흡은 장면을 감정의 진공상태로 끌어올린다.

결국 '은중과 상연'은 '사건'이 아니라 '감정'으로 움직이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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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은 첫회부터 믿음이 가는 작품이다. 배우 김고은과 박지현은 시간의 결을 얼굴과 몸짓에 새겨 넣고, 대본은 감정의 골을 비껴가지 않으며, 연출은 사건보다 표정과 침묵을 오래 붙잡는다. 이 세 축이 맞물리는 순간, 우리는 인물들의 삶 안으로 조용히 끌려 들어간다. 극찬이 아깝지 않다.

이 드라마가 특히 인상적인 이유는, 두 사람이 10대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30여년간 얽히고 쌓인 감정의 퇴적층을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는 데 있다. 이야기의 시작을 현재(조력 사망을 앞둔 만남)로 당겨 놓고, 이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미세한 균열— 선망이 원망으로, 원망이 다시 선망으로 되돌아가는 진자운동 —을 한 겹씩 드러낸다. 그래서 장면은 종종 고요하지만 감정은 격렬하고, 플롯은 단정한데 마음은 오래 흔들린다.

작품의 힘은 ‘이해하려는 욕망’이 어떻게 ‘오해의 확신’으로 변질되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주는 데서 나온다.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으면서도 끝내 모를 수밖에 없는 간극, 그 틈새에서 번지는 질투와 선망, 사랑과 결핍이 인물의 생을 요동치게 만든다. 카메라는 말의 끝보다 숨의 길이를, 독백보다 망설임을 더 오래 비춘다. 그리고 음악은 그 여백을 메우는 대신,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이러한 디테일들이 모여 ‘한 사람을 끝까지 이해한다는 일의 난망함’을 설득한다.

연기의 공로는 두말할 것 없다. 김고은은 올곧음의 진가를, 박지현은 상처의 균열을 각자의 피부로 구현한다. 둘의 관계는 보편적일 수 있지만 진부하지 않다. 갈등의 계기에 남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둘의 관계를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시간이 흐를수록 표정의 농도와 말의 무게가 변하고, 두 사람의 호흡은 장면을 감정의 진공상태로 끌어올린다. 좋은 대본은 배우에게 ‘연기할 거리’를, 섬세한 연출은 관객에게 ‘느낄 시간’을 내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과거와 현재에 함께하게 된다.

결국 ‘은중과 상연’은 ‘사건’이 아니라 ‘감정’으로 움직이는 드라마다. 이야기의 궁금증을 플래시백이 풀어 준다면, 마음의 미궁을 헤매게 하는 것은 감정의 연쇄다. 나는 여기서 K드라마의 강점 중 하나를 다시 확인한다. 세계 어디에도 흔치 않은, 감정을 전달하고 감정을 견디게 하는 힘, 그 힘이야말로 우리 드라마가 가장 멀리, 가장 깊이 닿는 방식이라는 가설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 가설을, 조용하지만 완강하게 증명해 보인다.

이지영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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