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잘못 없어도 은행이 ‘피싱’ 피해 배상하라는 당정

최정서 2025. 9. 25. 19:2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민주당 ‘보이스피싱 TF’ 발대식
보이스피싱 범죄 매년 증가세
무과실 배상책임 특단조치 꺼내
전문가들 “악용 우려” 목소리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신고대응센터가 24시간·365일 운영을 시작한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통합신고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정이 보이스피싱 피해에 대해 금융회사에 ‘무과실 배상 책임’을 지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은행 등의 잘못이 없더라도 일정 부분을 배상하라는 것이다. 보이스피싱 피해 규모가 커지자 꺼내든 특단의 카드다. 금융권은 소비자 보호 강화라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금융권에 일방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과잉 조치’라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25일 ‘보이스피싱 태스크포스(TF) 발대식 및 당정협의’를 열고 금융회사의 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책임 문제 등을 논의했다.

TF 간사를 맡은 더불어민주당 조인철 의원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당정은 최근 급증하는 보이스피싱 피해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국민 재산을 보호하고자 범죄 예방 및 재발 방지 대책을 신속하게 마련하는데 의견을 모았다”면서 “금융사들이 보이스피싱 피해액 일부 또는 전부를 배상하도록 하는 무과실 배상책임을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올해 1~7월 보이스피싱·스미싱 등 피싱 피해액은 799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5% 급증했다. 피싱 범죄 발생 건수는 1만6561건으로 전년보다 14% 증가했다. 작년 전체 피싱 피해액(9525억원)을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커지는 피해 규모에 당정이 무과실 배상 책임이란 강경책을 내놨다. 금융회사에 무과실 배상책임이 인정되면 피해자가 보이스피싱 범죄자에 속아 직접 자금을 이체한 경우에도 금융회사가 피해를 배상하게 된다. 무과실 배상 책임은 현재 여신전문금융업법(여전법), 전자금융거래법(전금법)에 적용되고 있다. 여전법 16조에서는 카드 분실 통지 이후 카드사가 금융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금법에서는 해킹 등의 금융사고 발생 시 전금업자에 배상 책임이 있다.

다만 범죄 단체가 아닌 금융사에 책임을 전가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번 무과실 배상책임 대상에 최근 해킹 사태로 문제가 된 이동통신사는 포함되지 않았다. 은행권은 보이스피싱 예방을 위해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등 자체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책임 없는 부분까지 떠안는 것은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조 의원은 범죄 단체가 따로 있는데 금융사에 책임을 지우는 것이 맞는 지와 법적 근거를 묻는 말에 “이제 법적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고 답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피해 방지를 위해 이미 모니터링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있다”며 “피해자 보호와 금융사의 책임을 균형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일률적인 배상 제도보다는 예방 기능 강화, 피해자의 주의 의무, 단계별 배상 한도 등을 포함한 종합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무과실 배상은 은행에 잘못이 없어도 모든 피해를 물어주라는 것인데 보이스피싱은 해외 범죄 조직이 주도하고 수법이 계속 진화해 은행만으로는 완전 차단이 어렵다”며 “수사권도 없는 은행에 허위 피해 주장까지 떠넘겨지면 실제 피해자 보호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은행이 전액 배상하게 되면 비용 부담이 커지고, 이는 대출 금리 등 다른 소비자 부담으로 전가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도 ‘무과실 배상책임’에 우려를 표했다. 고동원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행 전자금융거래법상 이용자의 고의·과실이 있으면 금융회사가 책임을 지지 않게 돼 있는데, 이를 개정해 무과실 배상 책임을 지우는 것은 합리성 논란이 있다”며 “통신사나 이용자 과실까지 배제하고 금융사에만 전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불합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금융사가 보이스피싱 피해를 예방할 수 있도록 기술적 투자나 내부 감시를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법으로 무과실 배상을 제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덧붙였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신용카드 도용 사고도 원래는 소비자 책임으로 돌려졌지만 카드사들이 고객 확보 경쟁 과정에서 전액 배상하는 관행을 만들어왔다”며 “보이스피싱 피해 보상 역시 은행 간 경쟁을 통해 자율적으로 마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다만 “국내는 금융사 간 경쟁 구조가 약해 제도적 강제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며 “금융은 자금 이동과 직결되는 만큼 책임 주체가 명확하지만 통신사는 단순 매개체라 책임 범위를 어디까지 물을지는 애매하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도 내놓고 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보이스피싱은 문자와 통신망을 통해 발생하는데 은행에 배상 책임을 지우면 오히려 시장을 키워주는 결과가 될 수 있다”면서 “피해자가 은행이 갚아줄 것이라는 생각에 경각심이 약해질 수 있고, 본래 경찰이 맡아야 할 영역을 금융당국이 은행에 떠넘기는 셈”이라며 지적했다.

최정서·유진아·윤상호 기자 emotion@dt.co.kr

Copyright © 디지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