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자의 색채와 제주의 불꽃… “낯선 두 화가가 제주에서 다시 말을 걸다”

제주방송 김지훈 2025. 9. 2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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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립미술관 10월 2일 특강 ‘보헤미안 랩소디’
샤갈과 강태석, 다른 시대가 남긴 자유와 즉흥의 언어
마르크 샤갈(왼쪽), 강태석. (제주도립미술관 제공)


파랑은 기억을 감싸고, 불꽃은 시대를 흔들었습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망명자의 시선으로 색채를 직조한 샤갈, 1960년대 제주에서 집합적 기억을 불러낸 강태석.
만난 적 없는 두 화가가 제주도립미술관에서 나란히 호명되고 있습니다.

오는 10월 2일 열리는 전시 연계 특강 ‘마르크 샤갈과 강태석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작품 해설에서 나아간, 예술이 시대와 환경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짚어내는 자리가 될 예정입니다.
강연은 홍익대학교 융합예술센터 강지선 연구교수가 맡습니다.

‘마르크 샤갈: 20세기 그래픽 아트의 거장, 환상과 색채를 노래하다’ 전. (제주도립미술관 제공)


■ 샤갈, 색채와 기억의 신학

마르크 샤갈(Marc Chagall·1887~1985)은 러시아 태생 유대인으로, 혁명과 전쟁, 박해의 시간을 살아냈습니다.
파리에서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를 접했지만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경계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세웠습니다.

그의 파랑은 어느 하나의 ‘색’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상처를 감싸는 울림이었고, 기억을 성역으로 끌어올리는 장치였습니다.
연인이 허공에 떠 있고 인물이 거꾸로 선 장면은 현실의 중력에 맞선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마르크 샤갈. (제주도립미술관 SNS)


제주 전시에는 10년에 걸쳐 완성한 석판화 연작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비롯해 300여 점의 그래픽 아트가 공개되고 있습니다.
샤갈이 남긴 색채의 신학은 지금도 관객에게 “기억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 강태석, 제주의 리듬과 집합적 기억

강태석(1938~1976)은 짧은 생애 동안 제주의 화단을 뒤흔든 이름입니다.
문자도, 전설, 암각화의 흔적을 회화 속에 불러오며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었습니다.
개인의 기록을 넘어, 제주의 집단적 기억을 발화한 실험이었습니다.

고(故) 강태석 작가. (제주도립미술관 SNS)


1964년 세운 ‘아뜨리에 1964’는 개인화실로서만 아닌, 제주의 젊은 미술을 움직인 작은 실험장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모여 ‘귤’ 동인이 탄생했고, 제주의 미술은 이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얻었습니다.

이번 회고전은 미공개작을 포함해 80여 점을 내놓으며 그의 궤적을 다시 소환합니다.
화면의 리듬과 색채의 반복은 마치 음악의 후렴처럼 관객의 감각에 박히고, 회화는 지금도 다시 연주되는 열린 구조로 남아 있습니다.

강태석 作 ‘가족’


■ 보헤미안과 랩소디, 그리고 리프레인

‘보헤미안’은 제도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태도이고, ‘랩소디’는 흩어진 서사를 즉흥의 노래로 바꾸는 형식입니다.

여기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리프레인(refrain, ritournelle)이 겹쳐집니다.
음악에서 후렴을 뜻하는 이 개념은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반복되는 리듬을 붙잡아 작은 질서를 만드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단순히 ‘반복’에만 머무르지 않아, 매번 차이를 만들어내며 새로운 세계를 여는 창조적 반복으로 이어집니다.

샤갈의 색채와 강태석의 붓질은 서로 다른 세기에 있었지만 결국 같은 원리에 닿아 있습니다.
혼돈 속에서도 리듬과 차이를 직조하며 예술을 통해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화가가 이번 제주에서 나란히 놓이며, 오래전의 언어가 데자뷰처럼 되살아나 관객 앞에 다시 호흡하고 있습니다.


■ 동시대와의 접속

오늘날 미술은 캔버스 안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관객과 공간까지 작품의 일부로 포괄하는 확장 회화(expanded painting), 디지털 감각과 아날로그 흔적이 교차하는 포스트-디지털(post-digital) 흐름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강태석의 작업은 이 지점과도 연결됩니다.
제주의 풍경과 신화, 전설을 화면 속으로 불러온 그 시도는 특정 시대의 기록을 넘어 지금도 관객의 체험 속에서 새롭게 읽히는 열린 구조를 지닙니다.
지역의 이름에 가두기보다 오늘의 미술 언어와 호흡하는 존재로 작가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입니다.

관람객이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강태석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다. (제주도립미술관 SNS)


■ 강지선 교수, 현장을 끌어안은 비평가

이번 특강은 제주 출신 강지선 연구교수가 이끕니다.
이화여대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시각문화 석사, 홍익대에서 미술비평 박사를 취득했습니다.

공공미술과 도시공간,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탐구하며 제주와 서울, 국제 미술 네트워크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해왔습니다.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제주갤러리 초대 디렉터, 세계유산축전 ‘불의 숨길’ 아트프로젝트 예술감독, 제주대 미술학과 강사로도 활동했습니다.

강 교수는 이번 강연을 준비하며 문헌 자료에만 기대지 않았습니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강태석의 화실이 있던 자리, 제자들이 모였던 공간, 그림 속 풍경과 맞닿은 장소를 직접 걸었습니다. 작가를 고립된 개인으로 두지 않고, 시대와 환경의 맥락 속에서 다시 불러내려는 시도였습니다.

샤갈의 석판화 연작을 감상하는 관람객. (제주도립미술관 SNS)


이번 특강은 도내 성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며 수강료는 무료입니다.
신청은 29일까지 제주도립미술관 누리집 ‘교육/행사–시민 교양 강좌’ 메뉴에서 온라인으로만 가능합니다.
선착순 100명이며 현장 접수는 받지 않습니다.

■ 그리고 전시, 맥락들

제주도립미술관은 이번 특강과 함께 세 개의 전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10월 19일까지 기획전시실 1에서는 ‘마르크 샤갈: 20세기 그래픽아트의 거장, 색채와 환상을 노래하다’, 기획전시실 2에서 ‘강태석: 열정의 보헤미안’ 전이 열립니다.
장리석기념관에서는 10월 26일까지 ‘남국일기’ 전을 통해 장리석(1916~2019)의 기증작품과 제주의 인연을 소개합니다.

이종후 제주도립미술관장은 “샤갈과 강태석의 작품 세계를 ‘보헤미안’과 ‘랩소디’라는 개념으로 나란히 조망할 수 있는 드문 기회”라며, “앞으로도 관람객들이 전시를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왼쪽부터) 제주도립미술관에서 나란히 진행 중인 기획전. 샤갈의 색채, 강태석의 붓질, 장리석의 초상이 한 화면에 겹치며 세계와 지역, 세대를 아우르는 시선을 드러낸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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