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POINT GOD’ 크리스 폴의 마지막 시즌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9월호에 게재됐음을 알립니다.
크리스 폴의 커리어는 시작부터 화려했다.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61세로 사망한 자신의 조부를 기리기 위해 61점을 넣은 후 62점 기회였던 자유투 2구를 일부러 놓친 ‘61점 게임’은 폴의 은퇴를 앞둔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웨이크 포레스트대학교 신입생 시절부터 폴은 이미 NCAA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평가받았다.
대학 무대에서의 활약을 발판삼아 폴은 2005 드래프트에서 전체 4순위로 뉴올리언스 호네츠에 지명됐다. 지명 당시부터 드래프트 최대의 실수로 평가받은 애틀랜타 호크스의 모험적인 선택으로 인해 (UNC의 마빈 윌리엄스 지명) 4순위로 미끄러졌지만 시즌 전 GM 서베이 ROY 부문에서 1순위 앤드류 보거트 (밀워키 벅스)와 거의 비슷한 표를 받을 정도로 폴은 기량이 공인된 루키였다.
2005-2006시즌 시작부터 끝까지 매월 이달의 루키에 선정되며 손쉽게 신인왕을 거머쥐었는데 만장일치에 단 1표가 모자란 압도적인 득표였다. 미 동남부지역을 강타한 초대형 허리케인으로 인해 홈구장까지 옮겨야만 했던 (2시즌 간 오클라호마시티로 이전, 이 당시 보여준 팬들의 열기는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의 창단으로 이어진다) 뉴올리언스에게 폴은 위안이자 선물이었다.
최고의 시즌
주전들의 줄부상으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낸 2006-2007시즌을 뒤로하고 3년차를 맞이한 크리스 폴은 숏미드 구간에서의 플레이를 완성시키며 픽앤롤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성적과 함께 MVP 컨텐더로 발돋움했다. 종전까지 빅맨이 스크린을 걸고 찔러 들어가는 ‘픽앤롤’ 공격의 메인디쉬는 언제나 빅맨이었지만 폴은 평균 두 자리 수 득점을 한번도 넘겨보지 못했던 타이슨 챈들러와 콤비를 이루며 픽앤롤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바운드 패스와 슬립무브를 무기로 했던 종전의 픽앤롤과 달리 폴의 픽앤롤은 플랫스크린과 플로터, 앨리웁을 무기로 리그를 강타했다. 단단한 스크린을 뱀처럼 파고들어간 (스네이크 드리블) 폴이 숏 미드 구간으로 들어가서 가드-빅맨을 앞뒤로 둔 채 볼을 키핑하고 (호스티지 드리블) 이때 한 템포 늦게 골밑으로 침투하는 챈들러의 커팅이 결합되면 상대는 폴의 플로터와 페이드 어웨이, 플로터 타이밍에 같은 폼으로 던지는 앨리웁 패스를 함께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폴은 이 시기에 완성시킨 고효율의 플로터와 앨리웁 패스를 킬러 컨텐츠로 삼아 빛나는 커리어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폴은 3-10피트 구간에서 (플로터 구간으로 불림) 52.8%의 야투율을 기록했고 스크린 후의 앨리웁을 무기로 장착한 챈들러는 생애 처음으로 두자리수 득점을 넘기며 야투율 2위 (62.3%)에 오르게 되는데 이전 세대의 존 스탁턴- 칼 말론, 스티브 내쉬-아마레 스타더마이어 등과 달리 이 콤비는 명백히 가드가 주인공이 되어 픽앤롤의 위력을 극대화한 사례다. 스크린을 받은 가드의 득점이 훨씬 많았다는 점, 빅맨에게 롤링보다 막는 스크린을 강조해 핸들러의 페인트존 진입을 우선시했다는 점, 뒷공간을 공략하는 롤링에 수직적인 요소를 추가하며 전봇대형 선수들을 고효율의 롤맨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폴은 과거와 차별화된 픽앤롤을 구사했으며 이 콤비와 모처럼 갖춰진 좋은 라인업의 힘을 앞세워 뉴올리언스는 서부 2위에 오르게 된다.
폴은 MVP 레이스에서 시즌 막판까지 코비와 치열하게 경쟁했으나 단 1승 차이로 서부 1위를 빼앗기며 MVP도 함께 내줬다. 뉴올리언스 또한 2008-2009시즌 주전들의 줄 부상, 2009-2010시즌 폴의 무릎 반월판 부상으로 인해 강호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2011-2012시즌을 앞두고 폴의 레이커스 행 트레이드가 확정됐다. 폴은 우승에 도전할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다. 문제는 뉴올리언스의 구단주가 공석이었다는 것. 이 트레이드는 당시 구단주 대행이자 NBA 총재였던 데이비드 스턴에 의해 취소되었다. 취소 사유는 ‘basketball reason’ 이었는데 레이커스를 제외한 나머지 구단들의 반대의견을 (NBA 사무국에서 운영을 대행하는 뉴올리언스는 29개구단이 공동 구단주인 상태) 수용한 결정으로 알려져 있다.
폴은 얼마 지나지 않아 LA 클리퍼스로 트레이드 됐는데 (몇 년 후 LA 클리퍼스의 구단주 도널드 스털링도 인종차별 발언으로 인해 퇴출되어 폴은 두차례나 구단주가 공석인 팀에서 뛰게 된다) 이적하자마자 클리퍼스를 당시 창단 이래 최고승률 (60.6%)로 이끌며 트레이드 취소의 아쉬움을 떨쳤다. 챈들러와 공수에서 움직임이 비슷한 디안드레 조던과 함께한 픽&앨리웁의 힘으로 클리퍼스는 ‘랍 시티’라는 닉네임과 함께 창단 이래 최고의 부흥기를 누렸다.
폴이 활약한 6시즌은 (2011-2012시즌부터 2016-2017시즌까지) 모두 클리퍼스 역대 탑10 승률시즌에 포함되어 있다. 이적과 함께 승률 20%를 끌어올리며 만년 유망주 군단이었던 팀의 역량 전체를 향상시킨 사례로 폴은 6시즌만 클리퍼스에서 활약하고도 프랜차이즈 역대 WS 1위에 랭크되어 있다. 그러나 고비마다 찾아온 무릎, 햄스트링, 손등 골절 등 부상과 고질적인 컨디션 저하, 2015년 컨퍼런스 파이널을 앞두고 3승 1패 리드에서 당한 어이없는 역전패 등으로 인해 우승까지 닿지는 못했다.

30대에 접어든 폴은 계약기간 만료를 1년 앞두고 트레이드를 통해 2017-2018시즌을 휴스턴 로켓츠에서 보냈다. 공격전술의 대가 마이크 댄토니 감독과 또 하나의 슈퍼스타 볼핸들러 제임스 하든을 보유한 휴스턴에서 폴은 다시 한번 프랜차이즈 사상 최고성적을 기록(65승 17패), 휴스턴을 워리어스에 대적할만한 강팀으로 만들어냈다. 하든과의 공존으로 픽앤롤 비중이 줄어들고 아이솔레이션 빈도가 크게 늘어나는 환경에서 폴은 최고수준의 아이솔레이션 효율을 보여주면서 (아이솔레이션 빈도 리그 2위: 29.3%, 1위는 제임스 하든: 35.0%) 하든과 성공적인 공존을 이뤄냈다.
더불어 스위치와 윙의 활발한 간여, 느린 페이스의 절충을 통해 훌륭한 수비력을 구축한 댄토니 감독의 창의성에 힘입어 휴스턴은 골든스테이트의 진정한 맞수로 평가받았다. 서부컨퍼런스 파이널에서도 5차전까지 3승 2패로 앞서나갔으나 바로 이 절정의 순간, 크리스 폴은 5차전 종료를 1분 앞두고 햄스트링 부상으로 쓰러지고 만다. 쌍두마차 중 한명을 잃은 휴스턴은 이해할 수 없는 슈팅난조로 7차전을 내주면서 우승에 실패했고 이듬해에도 골든스테이트에게 막혀 2라운드에서 탈락했다. 가장 우승에 가까웠던 순간을 놓친 폴은 점차 하향세에 접어들었고 하든과의 불화까지 겹쳐 두시즌만에 새로운 팀을 찾아 떠났다.
생애 첫 파이널
확연한 하락세에 접어든 폴은 러셀 웨스트브룩과 트레이드되어 오클라호마시티(OKC)로 이적했다. 우승을 원한 폴과 달리 OKC는 리빌딩을 하는 팀이었다.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햇병아리였던 샤이 길저스-알렉산더, 루 도트 등을 훌륭하게 리드하며 또 다시 승률 향상(59.8%에서 61.1%)을 끌어오면서 여전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전성기의 헤비 핸들링을 내려놓고 어시스트 커리어 로우를 (6.7개) 기록했지만 아껴 놓은 힘을 쏟아붓듯이 승부처마다 점퍼를 집중시키며 클러치타임을 견인했다. OKC가 울며 겨자먹기로 사용한 3가드는 (슈뢰더-SGA-폴) 팀내 최고 마진(+26.5)을 기록했는데 픽앤롤 볼핸들러의 대명사였던 폴이 숏미드에서 공을 오래 갖지 않고도 충분히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선수라는 것을 증명한 시즌이었다.
재기에 성공한 폴은 리빌딩 노선을 추구해온 OKC와 곧바로 이별한 후 본인의 희망에 따라 리빌딩 단계에 있던 피닉스 선즈로 이적했다. 폴이 가는 곳에 늘 승률 상승이 따라다녔듯이 피닉스도 이를 한껏 누렸다. 피닉스는 폴과 함께한 2020-2021시즌 프랜차이즈 최고승률을 (2021-2022시즌 64승 18패) 기록하며 파이널까지 올랐다. 숏미드 구간에서 오래 볼을 키핑하던 이전의 모습과 달리 폴은 데빈 부커-디안드레 에이튼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3인 액션을 (스페인 픽앤롤) 무기로 피닉스를 강팀으로 이끌었다. 피닉스는 휴스턴 시절부터 리그에 보이기 시작한 이 공격을 메인옵션으로 삼아 공격영역이 겹치는 부커, 에이튼, 폴을 성공적으로 공존시켰고 폴은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파이널에 진출한다.
그러나 파이널에서 만난 밀워키 벅스의 풀코트 프레스에 스페인 픽앤롤 시도가 차단당했고 수비에서는 야니스 아데토쿤보의 활약을 막아내지 못하며 폴과 피닉스는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다. 사상 최고승률을 기록한 이듬해(2021-2022시즌)에는 플레이오프에서 댈러스 매버릭스의 집요한 매치업 헌팅을 폴이 이겨내지 못했고 피닉스는 점차 우승경쟁 대열에서 멀어졌다. 클래스를 증명했지만 한끗이 모자랐던 피닉스에서의 모습이었다.

피닉스와 인연을 끝낸 폴은 이후에는 매년 팀을 바꿔가면서 우승에 도전했다. 노쇠화가 역력했지만 벤치멤버로서는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2023-2024시즌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스테픈 커리의 백업 역할을 기꺼이 맡았다. 데뷔 이래 처음으로 벤치에서 출전해 우승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면서 정규리그 58경기 출전에 그쳤다. 득점도 처음으로 한 자리수(평균 9.2점)로 떨어졌다.
2024-2025시즌에는 샌안토니오 스퍼스 이적해 빅터 웸반야마의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섰다. 선발 멤버로 복귀했지만 페인트존을 놀이터처럼 헤집고 다니던 과거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정규리그 82경기를 모두 출전했지만 떨어지는 생산성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0~3피트 슛 시도 비율은 리그에서 가장 낮은 2.6% (231위)이며 전 경기를 선발로 뛰고도 시즌 내내 시도한 드라이빙 레이업 시도가 5개에 불과할 정도로 모든 지표에서 더 이상은 페인트존으로 진입할 수 없다는 명확한 한계를 알려줬다. 정확한 3점슛과 밖에서의 안정적인 패스 공급은 여전했지만 픽앤롤 마스터로서 오펜스를 이끌던 모습은 더이상 찾아보기 어렵고 8차례나 디펜시브팀에 선정될 정도로 단단했던 대인수비 또한 사라진지 오래다.
폴은 몇 년 전부터 위크사이드 숏코너로 수비위치를 옮겨 숨어왔지만 공격리바운드와 포스트업을 노리는 상대팀들의 노골적인 헌팅 대상이 될 정도로 이제는 노쇠화됐다. 자신의 마지막 시즌임을 선언한 폴은 다시 클리퍼스로 향했다. 전성기의 힘을 잃고 은퇴시즌을 맞이하는 폴에게 남은 목표는 오로지 팀의 성공일 것이다. 데뷔시즌과 6차례의 이적시즌 중 성적이 오르지 않은 팀은 없었고(골든스테이트, 샌안토니오 조차도) 그중 3팀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기량은 떨어졌지만 한 차례의 예외도 없이 팀을 향상시킨 폴의 히스토리는 아직 진행형이기에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마무리를 기대해본다.
# 글_바스켓볼 다이제스트 Sonic44
# 정리_정지욱 편집장
# 사진_AP/연합뉴스 제공, 점프볼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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