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그곳에서] 험한 산을 즐기는 산꾼이 모여드는 섬 | 전원생활
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9월호 기사입니다.

지리산이라는 이름은 경남 하동, 전남 구례, 전북 남원 등에 걸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 그 지리산과 같은 이름이 맞다. 맑은 날 산 정상에 오르면 저 멀리 육지에 있는 그 지리산이 보인다는 뜻에서 ‘지리망산(智異望山)’으로 불리다가 ‘지리산’이 됐다. 원조 지리산의 해발고도가 1915m라면 사량도 지리산은 398m로 비교적 낮은 편이라 시시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종주 코스엔 직벽에 가까운 철 계단과 로프를 잡고 아찔한 절벽을 올라가야 하는 구간들이 버티고 있다. ‘산꾼들의 놀이동산’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산 좀 탔다는 사람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등산로다. 험한 산길을 오르면 기다리는 출렁다리는 지리산 등반의 또 다른 재미다. 무더운 여름 동안 잠자고 있던 등산화와 배낭을 흔들어 깨웠다. 그들과 함께 통영 사량도로 향한다.
오전 7시, 사량도행 첫 배에 탄다. 사량도 내지선착장 - 지리산 - 달바위산 - 가마봉 - 출렁다리 - 옥녀봉 - 진촌마을(금평선착장)로 이어지는 지리산 종주 산행은 5시간 정도 소요되는지라 등산객들 대부분은 첫 배를 타고 들어가 종주 후 마지막 배를 타고 통영으로 돌아오곤 한다. 첫 배를 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통영에 하루 전날 도착해 1박을 해야 한다.

선상에 나가 갯바람을 쐰다. 이름 모를 동글동글한 작은 섬이 배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사량도의 이름은 왜 사량도일까. 함께 승선한 주민이 어원에 관해 이야기해준다.
“‘사랑도’라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사량도’예요. 뱀 ‘사(蛇)’ 자와 들보 ‘량(梁)’ 자를 써요. 사량도는 크게 상도와 하도로 나뉘는데, 섬 사이에 난 해협이 구불구불한 뱀의 모양과 같다고 해 붙은 이름이에요.”
30여 분이 지난다. 배는 사량도 금평선착장에 정박한다. 기상예보상 ‘맑음’이던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핸드폰으로 급히 날씨 예보를 찾아보니 비까지 예고돼 있다. 종주 산행은 약 7km로 길이가 짧지 않다. 종주를 감행해야 할까 포기해야 할까 고민하다 진촌마을에서 출발해 지리산의 명물인 출렁다리까지만 가보기로 한다.
“그거 아세요? 이 지리산 때문에 사량도에 한 번도 안 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와본 사람은 없대요. 산에 올라가면 바다 풍경이 편안해요. 내해에 있는지라 사량도의 바다는 잔잔하거든요. 4년 전에 왔다가 그 풍경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오늘 또 왔어요.”
나무 계단을 15분간 오르니, 본격적인 바위 구간이 시작된다. 날카로운 바위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목장갑을 끼고 바위를 잡으며 조심히 오른다. 잠시 옆을 보니 아찔한 낭떠러지다. 긴장한 채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위험한 구간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깎아지른 커다란 암벽 아래 형성된 데크(덱) 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선 낙석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암벽의 거친 질감, 푸른 이끼,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만든 풍광이 한 폭의 예술 작품이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산행 길의 주요 포인트 중 하나인 옥녀봉(303m)에 도착한다. 나중에 주민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욕정에 눈먼 아버지가 딸을 범하려 하자 딸이 옥녀봉으로 도망쳤다가 몸을 내던진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란다. 옥녀가 떨어진 자리엔 사철 붉은 이끼가 있다. 주민들은 이를 옥녀의 피라 여긴다고 한다. 전설은 섬에서 가정과 사회를 유지하는 터부로 기능했을 터다.
경사가 거의 90도처럼 느껴지는 철 계단, 로프 하나만 달려 있는 암벽 등 위험한 구간이 계속된다(위험 구간에는 우회 코스가 있으니 무리하지 않는 게 좋다). 40분을 더 오르니 지리산 코스의 백미라 불리는 출렁다리에 도착한다. 낙타 등처럼 생긴 봉우리 3개를 연결하는 2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봉우리들과 어우러진 다리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흔들거리는 출렁다리 위에 한참을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막힘없이 불어오는 바닷바람 덕에 하늘에 떠 있는 기분이다. 내친김에 종주를 해볼까라는 욕심이 나는데, 함께 걸어온 부부가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기자를 말린다. 하늘이 원망스럽다. 별 도리 없이 하산하기로 한다.
계절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선다. 음식점 한쪽 벽면엔 사량도 관련 사진들로 빼곡하다. 2003년 태풍 매미에 쑥대밭이 됐던 섬마을의 모습, 앞에 언급된 전설처럼 옥녀가 떨어져 죽어 사철 붉은 이끼가 자라나는 바위. 그중 지리산 관련 사진이 가장 많은데, 엄홍길 대장과 정상에서 찍은 사진에 눈길이 간다.

“제가 지리산 산악구조대원으로 활동할 때 엄홍길 대장한테 연락받았어요. 가수 이문세 씨랑 지리산 산행에 가보고 싶은데 가이드가 돼 달라는 부탁을 하더라고요. 지리산 등산 코스는 1996년에 산악인 박정헌씨가 만들었는데 유격훈련을 방불케 하는 코스인지라 산악인들 사이에서 유명했거든요.”
엄 대장은 후련하게 트인 바다 풍경을 오래 바라봤다고 했다. 그에게 엄 대장과 지리산을 등반하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물었다.
“그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세계적인 산악인임에도 지리산 산행을 쉽게 보지 않았어요.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위험 요소가 있다는 걸 늘 인지하고 조심하는 태도가 있는 거죠. 산악구조대로 활동하며 지리산을 오르다 사고를 당한 분들을 보면 대다수가 자만심에 무리하던 사람들이에요. 산행하면서 담배를 피운다든지, 비오는 날 산행을 한다든지 등등요.”
비록 마음에 찜찜함이 남을지라도 때론 산행을 멈출 줄알아야 하고, 정상을 정복하는 것 못지않게 산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의 이야기로 되새긴다. 노루귀·변산바람꽃 등의 야생화가 피는 봄의 지리산도 아름답지만 단풍 들기 시작한 지리산의 모습도 아름답다. 이번 가을 사량도로 섬 산행에 나서보는 건 어떨까. 추씨의 말처럼 산을 두려워하는 태도는 챙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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