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기술과 돌봄, 정조의 능행
“농장다리 아래 그늘이 진 데가 있었어. 한여름이면 노인네들이 거기 모여서 시조창을 하면서 노닥노닥했지. 거기에 제방이 있는데, 내가 그걸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 참 좋아했다.” 아버지가 문득 풀어놓은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다. “하루는 내가 거길 기어 올라가다 떨어진 거야. 그랬더니 한 노인네가 허리춤에서 주섬주섬 환약 같은 걸 꺼내서 먹여줬다. 아마도 청심환 아니었나 싶어.” 아버지의 이야기 마무리는 약간 씁쓸했다. “요즘 같으면 어디 그렇게 돌봐줬겠냐? 그 시절엔 그래도 그런 정이 있었다.”
아버지를 보내드리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자동 결제가 될 것이니 돈 내실 필요가 없다고 했다. 요즘엔 그렇게도 되냐며 감탄하시더니, 택시 잡기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셨다. 조부모님 납골당 공원에는 택시가 잘 들어오지 않아서, 갈 때 아예 택시와 흥정을 해서 참배하고 나오는 시간 동안 대기를 해달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가격이 많이 올랐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앱을 깔면 된다는데, 내가 그걸 할 줄을 알아야지.”
아버지가 앱을 사용하실 수 있으면 나도 참 좋겠다. 변두리 공원이 아니더라도 요즘엔 시내에서도 빈 택시를 보거나 잡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앱 하나 깔아드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안질로 눈도 안 좋고 모바일 지도에도 익숙지 않은 아버지가 그 조그만 스마트폰 자판으로 목적지를 입력하고, 지도를 보며 택시 올 자리나 차량 번호를 확인하실 수 있을까 싶다. 이런 건 노인 대상 스마트기기 교육 같은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머리로 아무리 그 기능을 이해해도 다른 신체 기능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보내드리고, 계속 마음이 무거웠다. 기술 발전으로 세상은 편리해졌다는데, 배제되는 사람이 생긴다. 나도 언젠가 그렇게 배제되지 않을까? 인지 능력은 둘째 치고 아버지처럼 신체 기능이 못 따라가서 그러면 어떡할까. 그때야말로 기술의 도움이 절실할 텐데, 도리어 그 도움을 못 받는 처지에 놓이면 어떡할까.
착잡함을 곱씹던 중, 갑자기 화가 났다. 왜 사람이 기술 쫓아갈 걱정만 하고 살아야 하나. 기술을 못 쫓아가도 누구든지 옆에서 도와주면 되지 않나? 늙으신 아버지가 외딴 납골당 공원에서 택시를 못 잡아 전전긍긍할 때 누구든지 대신 택시를 불러주는 세상이라면,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왜 우리는 기술과 사람의 관계를 생각할 때, 늘 사람과 기술의 문제로, 그리고 사람은 기술을 따라가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가? 중요한 건 사람과 사람의 관계 아닐까?
230년 전 정조 역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서로에 대한 돌봄이 행해지지 않는 세태에 대해 고민했다. 정조는 ‘효’야말로 친부모로부터 더 넓은 공동체로 돌봄의 윤리를 확산시킬 수 있는 좋은 단서라고 생각했다. 그가 ‘효’의 기치를 올리고 어머니의 회갑을 기념하며 아버지의 능으로 행차한 것은 그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냉정하게 볼 때, 대단히 과시적이었던 정조의 능행이 그러한 단서를 얼마나 확산시켰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고민의 진중함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꼭 ‘효’가 아니더라도 이 시대야말로 돌봄의 윤리를 확산시켜줄 단서가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가?
이번 주말, 서울부터 수원까지 정조의 능행을 재현하는 거창한 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가 단순히 ‘역사문화 콘텐츠 활용을 통한 경제적 가치의 창출’ 같은 얕은 목표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역사를 콘텐츠로 활용할 때에는 그 외형만이 아니라 내용을 파고들 수 있어야 한다. 농장다리의 추억을 얘기하는 아버지께 자신 있게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면 좋겠다. “에이, 요즘에도 애가 다치면 당연히 주변에서 살펴보지” “택시 잡을 일 있으면 주변에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부탁해요”라고.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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