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6) 만주서 피어난 항일무장투쟁의 불꽃
만주, 1910~1930년대 항일 근거지
학생·청년·노인 등 전 세대 항일 한 뜻
중국 국민당·공산당과 공동 전선도
전남 출신 11명도 만주 활동 독립유공자
황덕환, 김좌진 휘하서 별동대장 중책
정완면, 대한독립군비단 부단장 활동
이병욱·병묵 형제 참의부서 독립운동
"곳곳서 펼쳐진 반일 활동, 묻힌 곳 많아"



일본의 1931년 만주침략 이후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 등 다양한 계열의 무장조직이 세워졌고, 각지의 항일근거지에서 목숨을 건 싸움이 이어졌다. 중국 정부는 항일에 대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지난 2017년 10월 전역의 항일 유적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중국 연길 공항 인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의 '어랑촌'은 대표적 항일 거점이다. 이곳은 1910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사 마을 주민들이 이주해 만든 마을이다. 1920년에는 청산리·봉오동 전투를 이끈 김좌진 장군 등이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가 창설됐다.
특히 이곳은 전남 영광 출신 독립유공자 황덕환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황덕환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군자금 모집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이후 만주로 도피해 영안형에서 신민부에 가입, 군사위원장 김좌진 휘하에서 별동대장으로 활동했다. 여러 활동을 하다가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장성 출신 정완면도 청산리 일대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정완면은 1922년 1월 중국 봉천성 무송현 탕하에서 대한독립군비단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대한독립군비단은 중국 장백현 팔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무장항일단체다. 1921년과 1922년에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으며 흥업단ㆍ광복단ㆍ태극단ㆍ백산무사단 등과 연합,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전남 담양 출신 이병묵은 3·1독립운동 후 형인 병욱과 함께 남만주의 관전현에 망명하여 참의부에 가입,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엔 신민부에 가입해 일제 고관 및 친일 한국인의 주살, 중요 시설의 파괴 등 임무를 수행했다. 신민부는 1925년 3월 북만주 영안성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일제에 대한 효율적인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북만주의 여러 항일단체들이 통합한 항일단체로,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를 중심으로 조직됐다.
청산리지역 항일 무장투쟁은 '어랑촌 13용사 기념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비석의 뒷면엔 항일 근거지 면적이 약 250만㎡이며, 중공 화령현위와 평강구위, 유격중대 제1, 2소대 주둔지, 인민혁명정부, 병기공장 등 유적지들이 보존됐다는 설명도 한글로 확인할 수 있다.

어랑촌에서 1시간 가량 떨어진 곳에는 1920년 '철혈광복단'의 '15만원탈취사건 유적지'도 있다.
15만원탈취사건은 국내에는 영화 '놈놈놈'의 모티브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최근 한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사례가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 유명세와 다르게 한 사람만 지날만큼 계단은 좁고 주변에 풀 밖에 없었다. 그냥 시골 도롯가에 존재해 따로 항일 역사 문화 투어를 하지 않는 이상 마주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만큼 철혈광복단이 왜 이곳에서 작전을 펼쳤는지, 얼마나 성공을 기원했는지 느껴지는 장소였다.
'무장투쟁'을 주장한 비밀결사단체 성격을 띤 철혈광복단은 일본의 '간도 철도 자금'을 해당 지역에서 탈취할 계획을 세운다. 부족한 자금을 충당해 무기를 구입,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해서였다. 아울러 사관학교 설립 그리고 조선에 신문사를 세워 대내외로 항일 계획까지 세웠다.
당시 15만 원은 지금의 150억 원에 달하며 당시 총의 시세로 환산하면 4천~7천여명이 무장할 수 있는 엄청난 금액으로 알려졌다. 철혈광복단 소속 청년 6인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최봉설 ▲김준 ▲박웅세는 조선은행 회령지행에서 용정지행으로 옮겨지던 대륙 철도 부설금을 탈취한다. 하지만 내부 밀정으로 인해 최봉설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탈취 계획은 실패로 마무리된다.

인근에 있는 '3·13반일열사릉'은 항일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919년 3·13만세 운동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는 묘지다. 3·13반일운동은 만주·용정 일대에서 전개된 대표적 항일봉기로, 일제 관헌과 직접 맞서 싸운 역사가 기록돼 있다. 현재 용정시 인민정부 중점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만주에서 이같이 항일운동이 적극적으로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은 만주 항일의 거점인 근대식 민족학교, 명동학교(명동서숙)가 수많은 인재의 요람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명동학교는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 1908년 4월 명동촌에 설립됐다. 규암 김약연(1865~1942)목사가 한민족기독교공동체인 명동촌을 세워 민족의 앞날을 밝혔다. 1911년에는 병설 여학교도 개설됐다. 명동학교는 1925년 폐교될 때까지 1천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나운규, 문익환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처럼 1910~1930년대 만주는 독립군과 주민 모두가 힘을 모아 일제에 맞섰던 항일정신의 산실이었다. 전남(광주) 출신들도 다수 항일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만주의 항일 유적지에서 이름은 찾아볼 순 없지만 국가보훈부 공훈전사사료관에 기록된 전라남도 출신의 만주 방면 유공자는 모두 11명이다.
황덕환, 정완면, 이병묵 등 청산리와 그 일대에서 활동한 3인을 비롯 고려혁명당에서 활동한 김정환(전남 고흥)과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보고 완도에서 거사를 계획한 송내호(전남 완도), 간도교육협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이종회(전남 영암), 만주 환인현에서 조직된 통의부의 총참모격으로 일제기관 폭파 및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한 오석완(전남 장성), 길림성 군정서 흥업단 적십자가 회계로 활동한 이만준(전남 장성), 중국 길림성 영고탑 재류조선인호회 역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대한독립군단 단원으로 활동한 신명식(전남 목포) 등 열사들이 주인공이다.
만주지역에서 항일역사문화 가이드를 하는 김모(50)씨는 "과거 긴 시간 동안 항일운동이 본격화 되고 항일 정신을 키울 근거지 마련, 중국과의 협력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항일 운동을 꽃피울 수 있었다"면서 "각지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항일 유적지가 많다. 후손들이 나서서 역사를 발굴하고 유적지를 보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만주/김성빈 기자 ksb@namdonews.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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