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옥’으로 불린 최고령 의병장, 회재 박광옥


- ‘학행’으로 관직에 나아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67세의 나이로 의병장이 된 분이 있다. 당시 의병장 중 최고령이었다. 운봉 현감 시절,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한 현장에 ‘황산대첩비’를 세운 박광옥이 그다.
박광옥(朴光玉, 1526-1593)은 1526년(중종 21년) 광주목 선도면 개산리(현 서구 매월동 회산)에서 사예 곤(鯤)의 아들로 출생한다. 본관은 음성, 자는 경원, 호는 회재이다. 박광옥은 7살에 부친을 여윈 후 개산의 동쪽에 서재를 짓고 편액을 ‘회재’(懷齋)라고 짓는다. 이는 부친을 그리워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 뒤 사람들은 박광옥을 회재 선생이라고 불렀고, ‘회재’는 그의 호가 된다.
10세 때 조광조의 제자였던 남원 출신인 정황의 문하가 된다. 21세인 1546년(명종 원년)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해 이름을 떨친다. 그러나 그의 관직 진출은 매우 늦다. 외척이 전횡을 일삼았던 정계의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1569년(선조 3), 명종이 죽고 윤원형, 이량 등 외척 세력이 제거된 뒤 신진 사류들이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되자, 44살 늦은 나이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된다. 그리고 받은 첫 관직은 내시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종 9품 내시부 교관이었다. 1574년(선조 7) 종부시 주부로 승진되고, 곧이어 운봉 현감에 발령된다. 부임하기 직전 실시된 별시문과에 급제한다. 그리고 운봉 현감 시절 그 유명한 황산대첩비를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세운다. 황산대첩비는 1380년(우왕 6)에 이성계가 황산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완전히 섬멸한 대첩을 기려 세운 비다.
400여 년을 버텨오던 황산대첩비는 일제에 의해 1945년 폭파되어 산산조각이 난다. 1957년, 파손된 비석들을 한데 모아 다시 비각을 세운 것이 지금 남아 있는 파비각이다. 박광옥과 왜와의 인연은 이때 이미 운명되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년인 임진년에 다시 쳐들어 온 왜군과 직접 맞닥뜨린다.
이후 그는 전라도사, 충청도사, 영광군수, 밀양도호부사, 나주목사 등의 외직과 사헌부 지평, 성균관 사예, 사섬시정 등의 내직을 거친다. 사섬시(司贍寺)는 조선시대 저화(楮貨)의 발행과 보급, 노비로부터 공납되는 면포를 관리하던 관청인데, 사섬시정은 정3품이었다.
그가 외직인 수령으로 나갈 때 가장 신경 썼던 일 중의 하나는 향교에서 고을 자제들에게 학문을 강독하는 일이었다. 운봉 현감 시절뿐만 아니라 영광군수, 밀양부사가 돼서도 오로지 학교를 일으키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그가 영광군수 시절 성균관을 모델로 세운 향교는 호남 최대 규모였다.

- ‘최고령’ 의병장이 되다
그가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낙향한 것은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난 1589년(선조 22), 그의 나이 64세였다. 그리고 3년 뒤 임진년(1592)에 왜란을 맞는다. 왜가 침입하자, 그는 나주의 김천일, 광주의 고경명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할 것을 약속하고 의병 모집 활동을 주도한다. 먼저 의병청을 설치하여 맹주로 추대된 후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았다.
박광옥이 의병청을 설치하고 맹주(盟主)가 됐음은 그의 제자였던 회헌 박희수의 ‘묘갈명’에 ‘設義廳于本州 推高公爲左道大將 朴公爲盟主’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박희수는 임진왜란 당시 광주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조부가 문간공 눌재 박상이었다. 박광옥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박광옥을 도와 의병청 설치에 참여한 분이었다. 박희수의 묘갈명에서 보듯 본주(광주)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고공’(高公)을 좌도대장, 박공(朴公)을 맹주로 삼고 있다. 묘갈명에 나오는 ‘고공’은 고경명을, ‘박공’은 박광옥을 가리킨다. 당시 고경명은 60세였고, 박광옥은 67세였다. 67세 의병장 박광옥은 임진왜란 당시 최고령 의병장이었다.
고령이었고 질병에 시달렸던 맹주 박광옥은 직접 전투 현장에 나아갈 수 없었다. 그의 임무는 광주를 지키는 일이었고, 의병과 군량을 모아 전선에 보내는 일이었다. 특히 광주목사 권율의 부대와 나주에서 거병한 김천일 및 담양에서 거병한 고경명 의진에 의병과 군량을 보급했다.
당시 박광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고 큰 힘이 되었는지는 김천일이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김천일은 고령인 박광옥이 의병을 이끌고 북상하려 하자, 이를 만류하면서 “전장에 참여한 것도 국가를 위한 것이요, 고향에 남아 지방을 방위하는 것도 국가를 위한 것입니다. 더구나 지방에서 근본이 한번 흔들리면 국사는 장차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의병이 잘 싸우고 못 싸우는 것은 오로지 공(박광옥)의 좌우 협조에 달려 있습니다”라는 편지를 쓴다. 김천일의 편지글은 유사경이 지은 박광옥 ‘행장’(行狀)에도 나온다.
의병 활동의 공로를 인정한 의주 행재소는 회재 박광옥에게 승정원 판교에 이어 나주목사에 임명한다. 박광옥은 불편한 몸으로 부임하여 고을 인심을 수습하다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 68세로 생을 마감한다.
- ‘삼옥’으로 불리다
박광옥은 당대를 함께 산 고봉 기대승과는 소년 시절부터 절친이었다. 기대승은 그의 1년 후배였지만 젊은 시절부터 도의적 사귐을 맺고 함께 학문을 절차탁마한다. 서로 왕래하면서 강론하기를 거의 빼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기대승과 박광옥은 광주를 대표하는 학자였다. 이는 광주향교의 중수 및 흥학비 건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560년(명종 15) 광주목사 유경심이 향교를 중수해 학풍을 일으키자, 박광옥은 제도와 학규를 바로잡아 생도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다음, 사전과 노비를 향교의 비용에 보탠다. 향교의 중수를 기념하여 흥학비를 세울 때 기대승은 비문을 짓고, 박광옥은 비석의 뒷면에 문장을 새긴다.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과 제봉 고경명과도 우애가 깊었다. 박광옥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도록 도움을 준 분도, 과거시험에 응시하도록 권유한 분도 박순이었다. 가까이에 살던 고경명은 자주 개산방죽에 지은 정자 ‘수월정’(水月亭)에서 어울렸고, 이미 살핀 것처럼 임진왜란 당시 박광옥과 함께 의청을 설치한 분이었다.
박광옥의 절친 중에는 23살 연하인 풍암정의 주인 김언거도 있었다. 특히 김언거와의 사이가 돈독했다. 함께 방장산(方丈山, 고창과 장성 사이에 걸친 산)을 오르기도 했고, 극락강의 뱃길을 따라 풍영정을 자주 찾곤 했다.
회재 박광옥은 당대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의 학문과 인품 때문이었다. 박광옥이 어떤 분이었는지는 남인의 거두였던 허목이 쓴 묘비문의 “선생은 심덕이 매우 후하기 때문에 온화하면서도 근엄하여 세인들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하면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는 기록만으로도 충분하다.

회재 박광옥, 그는 죽어서도 지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사후 10년 만인 1602년(선조 35), 그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벽진사가 서구 벽진동에 세워진다. 벽진사는 벽진서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 1681(숙종 7) 충장공 김덕령을 추가 배향하면서 의열사로 사액된다. 의열사가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자, 1927년에 풍암동에 ‘운리영당’을 건립한다. 그런데 풍암지구 개발로 운리영당이 또 헐리자, 1999년 운리영당 바로 옆 산자락에 ‘운리사’를 건립하고, 2018년 이름을 ‘벽진서원’으로 바꾼다.

박광옥을 기리는 사당이 이런저런 연유로 이곳저곳으로 옮겨지지만, 그에 대한 후손과 지역민들의 사랑만은 지극했다.

회재가 쌓았던 개산방죽은 지금 연꽃으로 가득 차 있고 인공 섬과 나무다리가 만들어져 시민들의 힐링처가 돼 있다. 나무다리 끝 무렵에 회재가 시회를 열고 향약을 실시했던 수월당이 복원돼 있다. 그리고 방죽 언저리에 그를 기리는 회재 선생 유허비가 두 개나 서 있다.

그의 사위였던 예조정랑 유사경이 쓴 ‘행장’과 남인의 거두 허목이 쓴 ‘묘비문’, 한국 고전번역원 원장인 박석무가 쓴 운리사 사당의 마당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운리사묘정비’도 그가 어떤 분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런 흔적과 기록들이 남아 전하고, 그의 학덕과 절의 정신이 추앙되면서, 그는 광주에서 가장 길고 넓은 도로명인 회재로의 주인공이 된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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