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에서 떨어진 장기판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이명석 | 문화비평가
마음이 울적하면 거기로 가면 된다.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친구들이 모여 있으니까. 나무가 우거지고 새들이 노니는 공원이라 더욱 좋다. 입장료도 예약도 필요 없다. 누구든 짝을 맞춰 또각또각 말을 놓는데, 이기면 좋고 지면 ‘한판 더’ 하면 된다. 이것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다. 복지 사회의 이상, 혹은 낙원의 풍경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 장기 바둑판이 쫓겨났다. ‘문화유산법’에 따라 ‘위반 시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판까지 붙었다. 그래, 어른의 사정이 있었겠지. ‘흡연, 음주가무, 상거래 행위’의 폐해가 적지 않았나 보지. 하지만 누군가의 낙원이 하루아침에 부서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갓 ‘오락 행위’라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들을 시기해 왔다. 집 근처 공원의 꼭대기 상석에도 항상 바둑 장기판이 열린다. 그 낙원이 부럽지만 보이지 않는 울타리 때문에 다가가진 못했다. 노년 남자들이 독점한 공간의 텃세에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어설픈 실력으로 덤볐다간 훈수꾼들에게 된통 욕을 먹을 것 같았다.
나는 여행을 다니면 그 지역의 놀이를 유심히 본다. 쿠바와 카리브해의 길거리 테이블에서 네명이 딸그락거리면 도미노를 하는 거다. 조선 시대 궁녀들이 했다는 골패와 가까운 친척이다. 중화권의 공원, 시장에 비슷한 탁자가 있다면 마작이다. 서양의 공원에선 체스, 루미큐브, 다양한 카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항상 볼 수 있다.
우리 공원의 바둑 장기도 비슷한 문화다. 다만 거기엔 뭔가 어두침침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흡연, 술판, 음성적 내기 같은 그림자 때문이다. 탑골 공원도 문제가 되는 건 술꾼과 노숙인들이지만, 그들을 노인들의 놀이판과 두루뭉술하게 엮는 편견이 남아 있다.
일본의 마작도 비슷한 어둠에 덮여 있었다. 그러다 1988년 ‘아이와 함께하는 마작대회’에서 제안했다. ‘마시지 않는다! 내기하지 않는다! 피우지 않는다!’ 이는 21세기 고령화 사회의 노년층을 향한 ‘건강 마작’의 모토가 되었고, 엔에이치케이(NHK) 문화센터와 지자체에서 앞다투어 마작 교실을 열고 있다. 엠(M)리그라는 프로마작리그도 마작의 불건전한 이미지를 털어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알파고 이후 바둑계가 침체와 혼란을 겪고 있다. 그런데 체스는 딥블루에 궤멸당하고 30년에 이르는데 오히려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과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도 컸지만, 인공지능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최고수에게 인공지능은 성벽을 부수고 들어온 ‘진격의 거인’이지만, 입문자에겐 세상 친절한 선생님이다. 누구든 온라인 게임으로 실력을 쌓아가면 진짜 체스 말을 잡고 싶어진다. 인간은 작고 단단하고 예쁜 걸 손으로 만지며 머리를 쓸 때 큰 기쁨을 얻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세계 최고수를 꺾은 ‘퀸스 갬빗’의 주인공은 공항으로 가던 차에서 내려 혼자 공원에 간다. 그날 차가운 공원에 가장 먼저 와서 체스판을 펼쳤던 노인과 게임을 하며 이야기를 마친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비슷한 모습을 봤다. 걸그룹 멤버인 유나가 우이동의 솔밭공원에서 어르신들과 오목 대결을 벌이며 말한다. “너무 신기하다. 이런 곳이 있는 줄 처음 알았어요.”
문제는 오락 행위가 아니라 공원의 문화다. 공원의 놀이판에 다양한 세대와 성이 어우러질 순 없을까? 진입장벽이 낮은 오목이 첫수가 될 수 있다. 바둑의 전설 이세돌이 오목을 즐기던데, 전국 공원의 오목판을 순례해 주면 어떨까? 그렇게 조금씩 판을 흔들고 문을 넓혀보자. 나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바둑판, 엄마와 아이의 오목판, 젊은이들의 루미큐브가 어우러지는 공원을 그려 본다. 마작도 사행성 게임이라는 오명을 벗고 슬그머니 끼어들어야지.
왜 하필 공원인가?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간에는 나쁜 행위가 끼어들기 어렵다. 그리고 구경만으로도 기분이 좋거든요. 고령화와 고독사를 걱정한다면, 공원의 오락에서 치료법을 찾아보시라. 장기와 바둑판은 낙원의 신선이 실수로 떨어뜨린 것이다. 그 보물을 왜 내버리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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