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체크] APEC 만찬장 변경 논란... 예견된 문제? or 필연?

경주에서 오는 10월 말 개막하는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30여일 앞두고 공식 만찬장이 국립경주박물관 중정에서 라한셀렉트 경주호텔 대연회장으로 전격 변경됐다.
정부와 경북도는 참석 인원이 대폭 늘어난 데 따른 불가피한 조치라고 강조하지만, 지역사회는 예견 가능한 문제를 뒤늦게 인지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과 함께 80억 원의 예산 낭비 논란까지 제기되고 있다. 또 대한민국과 개최도시 경주 정체성을 대변할 프로그램은 충분한 지에 대한 의문도 증폭되고 있다.
◆만찬장 변경은 필연

정부와 경북도, 경주시는 지난해 말부터 만찬장 후보지를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첨성대와 월정교, 동궁과 월지 등 경주의 상징적 장소들이 거론됐으나 문화재 보존 문제와 발굴 조사 시간, 공사 현실성 등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결국 이미 발굴 조사가 끝난 박물관 경내로 결정됐다.
이 과정에서 경북도는 '문화 APEC'을 표방하며 80억 원의 국비를 투입해 전통 한옥 양식의 건물을 세워 세계 각국 정상과 경제인을 맞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경주의 문화적 위상을 세계 무대에 알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준비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드러났다. 신축 건물은 연면적 2천㎡ 규모로 설계됐지만 공연장 시설이 함께 들어서면서 실제 좌석은 230여 석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당초 기대했던 600석 규모와는 큰 차이가 났다. 더구나 내부에 화장실과 조리시설이 설치되지 않아 VIP를 제외한 참석자들은 50m에서 300m 떨어진 외부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불편이 예상됐다. 비라도 내릴 경우 안전 문제까지 제기됐다. 조리실이 없어 외부에서 음식을 반입해야 했다. 가까운 커피숍에 조리실을 설치하는 등으로 준비했지만 이는 정상급 만찬으로서는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결국 정부와 외교부, 경북도는 지난 19일 열린 APEC 준비위 9차 회의에서 만찬장을 라한셀렉트 경주호텔 컨벤션홀로 변경 의결했다. 호텔의 컨벤션홀은 1천498㎡ 규모로 최대 1천명 이상 수용할 수 있으며 주방과 화장실, 분장실, 대기실 등 지원 시설이 완비돼 있어 안전과 의전 측면에서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또 라한셀렉트는 정상회의장 경주화백컨벤션센터와 1㎞ 거리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21개 회원국의 정상들이 머무는 숙소와 연접해 있어 이동에도 유리하고 편리하다. 또한 경호에도 안전성이 높다는 평이다.
외교부는 "박물관 만찬장은 공연장 설치로 실수용 인원이 230여 명에 그쳐 현실적으로 초청 인원을 수용할 수 없다"며 "600명 이상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서 호텔로 장소 변경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경북도 역시 "행사에 초청된 글로벌 기업 CEO와 해외 언론인의 규모가 당초 예상치를 크게 웃돌게 됐다"며 "호텔은 경호와 동선, 의전이 완벽히 준비된 공간으로 국제행사에 적합하다"고 강조했다.

◆만찬장 변경이 전화위복 되도록
하지만 비판 여론은 여전하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지난 2005년 부산 APEC 만찬장은 4천396㎡ 규모에 1천명을 수용했는데, 그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박물관 신축 건물이 정상급 만찬에 적합할 수 없다는 사실은 초기 단계부터 드러나 있었다. 또 화장실과 조리시설 부재는 설계단계에서 충분히 파악 가능했음에도 정부와 지자체가 소홀하게 대응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APEC정상회의지원단 관계자는 "화장실과 조리실은 중앙부처 등에서 60회 이상 점검하면서 이상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조리시설은 50m 거리의 카페시설을 활용하기로 계획했고, 화장실 또한 D데이 10일 정도 앞두고 충분하게 설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80억 원의 예산도 도마 위에 올랐다. 국비로 건설 중인 신축 건물이 정상 만찬장으로 활용되지 못하게 되면서 '세금 낭비'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APEC정상회의준비위는 "2년 간 국가시설로 문화관광을 위한 산업시설로 운용하다가 그 이후에는 다시 활용방안을 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지역사회에서는 "사후 활용 계획이 분명하지 않다면 결국 행사를 위한 임시 건물로 끝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지역 주민들의 여론은 복잡하다. 일각에서는 "세계 정상이 참석하는 행사에서 안전과 의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결정은 불가피했을 것"이라며 이해를 보이는 여론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경주의 정체성을 홍보하며 문화적 상징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호텔로 대체해버린 것은 아쉽다"는 목소리도 크다. 당초 경북도는 박물관 만찬장에서 에밀레종 타종과 사상 최초 6개의 국내 모든 금관 전시 등으로 경주의 정체성을 알리겠다고 했지만 장소 변경으로 이런 연출의 효과는 사실상 사라지게 됐다.
경주시의회 A 의원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지어진 시설이 행사 이후에도 지역 발전의 자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운영하는 일"이며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증명하려면 숫자와 계획, 실행력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한편 정부와 경북도, 경주시는 박물관 공간을 활용한 문화 프로그램 보완책을 내놓고 있다. 박물관 신축 건물은 정상회의 기간 동안 기업 전시와 문화 공연, 전통 예술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교류의 장으로 운영한다. 경주시는 금관과 유물을 활용한 전시, 지역 예술인의 공연 등을 통해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 각국 대표단에게 보여줄 계획이다. 또 행사 이후에도 신축 공간을 활용해 국제 학술대회나 지역 문화행사에 사용할 수 있도록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APEC 정상회의는 경주가 세계적인 문화관광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번 만찬장 변경이 준비 부족이라는 오명을 남길지, 아니면 새로운 문화 인프라로 이어지는 전화위복이 될지는 향후 정부와 경북도의 운영 역량에 달려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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