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박해수 연극 ‘벚꽃동산’…서울 배경에 빠져든 홍콩 관객들
“관객들, 한국 작품 자주 접해 리듬과 호흡에 익숙”

지난주 홍콩 무대에 오른 연극 ‘벚꽃동산’은 21세기 문화 콘텐츠의 글로벌 융합을 잘 보여준다.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 원작을 스위스에서 성장한 오스트레일리아 태생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지금의 서울을 배경으로 각색한 작품인데, 제작은 엘지(LG)아트센터가 맡았다. 홍콩 관객이 전도연, 박해수 등 영화와 드라마로 낯익은 배우들에게 열광하는 모습이 이채롭게 다가왔다.
체호프의 마지막 희곡인 ‘벚꽃동산’은 농노해방(1861) 이후 귀족의 몰락과 신흥 자본가의 부상이 교차하는 러시아 제정 말기의 격변기를 그린 작품. 스톤이 원작을 한국식으로 변형해 파산에 내몰린 재벌 3세 여성의 이야기로 각색했다.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뒤처진 사람들의 불안과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지난해 서울과 부산 무대에서 4만여 관객을 만난 작품인데, 이번엔 홍콩 아시아플러스 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초청됐다. 3회 공연 4200여 좌석이 전석 매진됐다.
객석 분위기는 서울보다 뜨거웠다. 지난 20일 홍콩문화센터를 가득 메운 1400여명 관객은 1·2층과 지붕 등 삼각형 모양 무대 여러 곳에서 배우들이 동시에 쏟아내는 한국어 대사에 빠르게 반응했다. 영어와 중국어가 함께 표기된 자막이 나오기도 전에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두 딸의 연애 상대와 ‘썸’을 타고 키스하는 분방한 모습의 주인공 전도연이 “지금은 2025년이잖아”라고 하는 대목에선 탄성이 터졌다. 박해수가 “넷플릭스 영화를 봐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어”라고 할 때도 웃음이 번졌다.

공연이 끝나고 밤 11시 가까이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관객 대부분이 자리를 지켰다. 전도연은 “대사가 많고 호흡도 빠른 작품인데 어떻게 우리말을 이렇게 잘 알아들으시는지 너무 신기하다.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에 여기가 한국인지 홍콩인지 모를 정도로 어리둥절했다”며 놀라워했다. 박해수 역시 “커튼콜 인사를 세번이나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홍콩 관객의 열기가 단순히 배우들의 인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관객과의 대화’ 사회를 맡은 홍콩 극작·연출가 렁싱힘(필명 얏야우)은 공연 뒤 따로 만난 자리에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접한 홍콩 관객이 한국 작품의 리듬과 코드에 익숙해진 것 같다”고 짚었다. 실제로 한국어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관객들도 많은 듯했다. 공연 이후 로비에서 만난 관객 시실리아(44)는 “한국 드라마를 이해하기 위해 친구들과 학원에 다니며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홍콩과 서울의 사회·역사적 유사성도 작용한 것 같다. 1997년 중국에 반환된 홍콩은 2010년대 반정부시위로 사망자가 속출한 이후 과거와 사뭇 다른 도시가 됐다.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의 한국 청춘들이 홍콩 영화를 통해 자유를 꿈꿨듯이, 이제 홍콩 관객들은 한국의 영화와 연극, 드라마 속에서 자유를 숨 쉬는지도 모른다. 스톤은 “한국과 홍콩 모두 빠른 변화를 겪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 관객들이 작품에 더욱 공감한 것 같다”고 했다.
각색과 연출의 힘도 빼놓을 수 없다. 체호프는 원래 이 작품에 ‘희극’이란 주석을 달았는데, 스톤 특유의 ‘배우 맞춤형’ 작업 방식이 작품의 희극성을 더했다. 스톤은 워크숍을 열어 배우들 각자의 개성과 캐릭터를 추출해 대본과 연출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유명하다. 렁싱힘은 “러시아 고전을 현대 배경으로 각색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데, 이번 ‘벚꽃동산’은 각색도 배우들 연기도 흠결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공연을 본 다른 연출가가 에스엔에스(SNS)에 “체호프가 ‘벚꽃동산’을 왜 희극이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는 글을 올렸다고 전하며 “나도 연극 인생 30년 만에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벚꽃동산’은 홍콩 공연을 시작으로 11월 싱가포르, 내년 2월 오스트레일리아, 9월 미국 뉴욕 공연으로 이어진다.
홍콩/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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