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좋아질 때까지 좋아해본 것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저자 2025. 9. 2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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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시기, 학교 근처 작은 와인바에서 일한 적이 있다. 주말 저녁에 그곳에서 일했다. 친구들과 MT에 가서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카스 같은 술만 마시다가 다양한 와인과 위스키, 코냑, 칵테일 등을 접하며 미식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읍 단위 지역에서 나고 자라 이제 막 서울로 온, 김치찌개와 청국장 등 한식에만 익숙하고 기껏해야 아웃백이나 애슐리를 가는 것이 연중 최고 경사였던 내게 신세계였다.

복잡한 이름을 가진 고급술들을 하나씩 익혀가면서 술의 세계가 엄청나게 넓고 풍부하며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그 역사가 길고, 이것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섬세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복잡한 외국어 이름들이 즐비한 메뉴판과 약간은 고상 떠는 바의 분위기 안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다양한 반응을 관찰하는 것도 큰 공부였다.

‘여기 분위기 되게 좋아.’ 데리고 온 연인 앞에서 가능한 한 그럴싸하고 멋들어지게 주문하고 싶어 무리하는 남자애처럼, 그 시기의 나도 아직은 내가 아닌 것을 선망하며 아름답게 여기고 이미 나인 것들은 함부로 대하며 촌스럽게 여겼다.

그때 와인 테이스팅하는 법을 처음 배웠다. 마셔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무엇이 좋고 무엇이 좋지 않은지도 잘 몰랐다. 혹은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감각을 신뢰하는 법을 잘 몰랐다. 남이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사장님과 매니저 언니가 어떤 와인을 한번 맛보라고 한 잔 따라주었다. 비싼 거라고 했다. 매니저 언니는 요리 전공으로 미식에 일가견이 있었다. 나는 배운 대로 잔을 한 번 돌린 뒤 향을 맡고 맛보았다. 고무 맛이 났다. 폐타이어의 냄새를 맡는 것 같았다.

“맛있어?” ‘음…’ “맛있어?” ‘음… 고무 맛이 나는 것도 같고…’ “그냥 말을 해도 돼!”

나는 내가 감각한 맛에 자신이 없었다. 비싼 와인이라고 했으니 고무 맛도 맛있는 거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장님과 언니의 반응을 기다렸다.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맛있다고 하면, 그것을 맛있다고 생각할 참이었다. 그게 나의 20대 초반이었다. 와인 맛만 그렇게 느꼈을까?

소속되고 싶어서, 선택받는 사람이고 싶어서, 무엇보다 사랑받고 싶어서 내가 아닌 존재를 연기하며 살거나 내가 내가 아니기를 소망하던 일에 대해 생각하자면 그레타 거위그 감독의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도 떠오른다.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는 주인공은 근사한 예술가가 되고 싶어 하는 고등학생이다. 어울리고 싶은 친구 제나 앞에서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짧은 장면이 있다. 제나가 어디 사냐고 묻자, 상류층 동네 이름을 대며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한다. 쿨한 척, 아는 척 힙스터 남학생의 이름까지 흘린다. 레이디 버드의 어색한 표정과 몸의 동세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우스운 장면이다.

이국적인 음식, 고급스러운 술, 정제된 가구 취향, 근사해 보이는 친구들, 지적인 책들, 도무지 뭐가 좋은지 알 수 없는 희한한 음악, 세련된 옷차림… 내 것이 아니지만 내 것이었으면 해서 안간힘을 쓰는 시기가, 아름다움을 좇는 사람들에게 있는 듯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쫓으며 좋아하다 보면 놀랍게도 어느새 그것들은 나의 일부가 되어 있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싶어서, 좋아질 때까지 좋아하다 보면 정말로 그 좋음을 누릴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이제 나는 와인을 정말로 즐기고, 더 이상 메뉴판 앞에서 위축되지도 않는다. 권위 있어 보이던 사람들이 나만큼이나 헤매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동경하던 것이 마침내 나의 것이 되었을 때, 고작 이것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꼭 그만큼 잃어버린 나였던 것들 앞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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