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국가들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행렬…중동서 미 영향력↓

정의길 기자 2025. 9. 23. 16:16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우디가 프랑스와 협조해…가자전쟁 악화 우려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2일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국가를 승인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블룸버그뉴스 연합뉴스

영국과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대열에 동참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수십년된 중동 외교 지형을 깨는 이번 외교 조처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에 의해 추동돼,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 약화를 재촉할 것으로 보인다.

마크롱 대통령은 22일 프랑스와 사우디가 공동 주최한 팔레스타인 분쟁의 두 국가 해법 정상회의에서 “평화를 위한 시간이 왔다”며 “그 어떤 것도 가자에서 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발표했다. 그는 “누구는 너무 늦었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 이르다고 말한다”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유엔 총회 기간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포르투갈, 프랑스, 벨기에, 모나코, 몰타, 룩셈부르크, 안도라, 산마리노가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했다. 가자전쟁 발발 뒤 이스라엘에 종전 압박을 하지 못하는 미국에 불만을 가진 마크롱에 의해 추동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다.

마크롱은 지난 2024년 2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을 방문해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은 “프랑스에게 금기가 아니다”고 처음으로 선언했다. 2024년 말 사우디가 화답했다. 사우디는 프랑스에게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과 관련해 다른 국가들을 압박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우디는 그렇게 하면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위한 길이 다져질 것이라고 말했다. 마크롱은 12월에 사우디를 방문해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와 만나 이 사안을 논의했다.

몇달 뒤 그는 이집트를 방문해서는 가자전쟁에 부상당해 치료받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보면서 가자의 인도적 위기 현실을 몸으로 느꼈다. 이집트 방문 직후인 4월 초 마크롱은 프랑스와 사우디가 6월 공동 주최할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관련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하지만 6월 중순 예정됐던 유엔 회의는 이스라엘의 대이란 침공으로 취소·연기됐다.

7월 영국을 국빈방문한 마크롱은 키어 스타머 총리와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논의를 이어갔다. 그는 영국 의회 연설에서 “가자와 서안이 매일 공격받으면 폐허가 되고 있다”며 “팔레스타인 국가가 지금처럼 위기에 처한 적은 없다”고 말해 영국에 대한 일종의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마크롱과 사우디 쪽은 유엔에서의 두 국가 해법 정상회의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이 회의의 목적은 아랍 국가들이 공동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공격을 비난하고, 하마스의 무장해제와 새로운 팔레스타인 국가에서 하마스의 역할 부인 등을 요구하는 한편 팔레스타인 국가를 승인하는 것이었다. 7월 말 마크롱은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스는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을 할 계획이라고 전격적으로 밝혔다.

주요 7개국(G7)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 방침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는 서방 국가들의 동참 대열의 문을 열었다. 그는 편지에서 “중동 분쟁에서 협상을 통한 해결 전망이 멀어졌다”면서도 “나는 이에 굴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주 이스라엘 텔레비전과 회견에서 “나에게 국가 승인은 과정이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행동과 약속을 촉발하는 것”이라고 말해, 프랑스의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이 중동 분쟁 해결의 촉매제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마크롱이 추동한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미국과 이스라엘 관리들은 마크롱의 이런 움직임이 오히려 부패와 무능에 찌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개혁 전망을 흐리게 할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미국의 한 고위 관리는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은 두 국가 해법에서 팔레스타인 개혁 기회의 실질적 종말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번 서방 국가들의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행렬은 중동에서 격변하는 외교 지형을 보여준다. 중동 문제에서 미국의 고삐가 풀리면서, 중동에서 사실상 현실을 바꿀 힘이 없는 프랑스에 의해 기존 질서가 흔들리는 것이다. 고립에 빠진 이스라엘이 서안 합병 등 극단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커지고, 사우디 등 중동 국가들도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재조정할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가자 전쟁은 더 격렬해지고, 팔레스타인 국가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로에 서게 됐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