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억 달러 ‘공수표’가 ‘악수’ 됐나…대미협상, 왜 한국만 지지부진?
“장기전 불가피…조건 재협상과 기업 지원 병행해야”
(시사저널=오유진 기자)

한·미 관세 후속 협의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대미 투자 규모, 이익 분배 구조에 대해 양국은 이견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전까지 협의를 마무리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강경하다. 한국도 '국익에 반하는 협상은 없다'는 방침을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협상 장기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당초 외교당국은 지난 7월 합의한 3500억 달러(약 487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시나리오가 직접적인 현금 이동이 아닌, 제한적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봤다. 지분투자는 5% 내외에 그치고, 대부분 공공기관을 통한 보증 형태의 투자가 이뤄질 것이라고 설명했던 이유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과 체결한 양해각서를 근거로 투자액 전액 현금 납입, 투자 이익의 90% 분배를 요구하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고, 전략 자원이나 기축통화가 없다는 '3대 약점'을 가진 한국은 협상 돌파구를 좀처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최근의 협상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지목되는 건 '외환 체력' 부족이다. 일본은 기축통화국이라는 지위를 앞세워 5500억 달러(약 766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투자 규모는 한국보다 크지만, 일본의 외환보유액 대비 42.2%, 전체 예산액 대비 31.2% 수준으로 충분히 소화가 가능하다는 평가다. 또한 미국과 통화스와프가 체결돼 있어 엔화 채권을 발행하는 등 금융시장 충격을 피할 수 있다는 점도 우리와 다르다. 그러나 한국의 투자액은 예산액 대비 69.4%에 달하는 데다 외환보유액의 84%를 투입해야 해 협상이 체결될 경우 환율과 자본시장에 직격탄을 입을 수 있는 상황이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한·미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체결되지 않으면 투자액의 상당 부분을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에서 충당해야 한다"며 "이로 인해 외환보유고가 4000억 달러 아래로 줄어들면 국내에 유치한 외화 자본 유출, 외환시장 공격, 환율 변동성 확대 등 여러 부정적인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22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미 간) 통화 스와프 없이 3500억 달러를 전액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며 강한 우려를 표했다.
협상 카드 빈약한 한국, 투자 약속이 '악수' 됐다
한국이 미국을 설득할 만한 '비장의 무기'가 없다는 점도 문제다. 한국은 지난 7월 무역 협상 테이블에 조선업·원전 분야의 협력을 내세웠지만, 최근 한국인 구금·비자 문제가 겹치면서 협력 동력이 약화됐다. 반면 중국은 미국과 세 자릿수에 육박하는 상호관세를 주고받으며 무역 분쟁을 벌여왔지만, 희토류·첨단 반도체 등 전략 자원을 무기로 관세 유예를 이끌어내며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최근에는 양국이 틱톡 매각과 관련해 5년 만에 합의점에 도달하면서 중국이 한국보다 먼저 무역 협상을 마무리지을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온다.
구기보 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교수는 "한국은 농수산물 수출, 소고기 시장 개방 등의 대내적 이익을 고려하다 보니 대규모 투자를 약속할 수밖에 없었는데, 세부 협의 과정에서 정부 의도와는 다른 조건이 붙으면서 오히려 악수(惡手)가 됐다"며 "농산물 시장 개방 등 획기적인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안이 없다면 쉽게 합의점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세부 협의가 늦어지면서 국내 기업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대미 수출 상위 10개국에 부과된 관세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분기 한국이 부담한 대미 수출 관세액은 33억 달러에 달했다. 부과 규모로는 중국·멕시코·일본·독일·베트남에 이은 6위지만, 관세 증가율로 환산하면 47.1배로 10개국 중 가장 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국의 일방적 요구를 수용하기보다는 협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서 관세 피해를 입은 기업을 지원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구 교수는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강행할 경우, 25% 관세 부과로 인한 타격보다 큰 경제적 피해를 보게 될 수 있다"며 "기업의 관세 피해를 보전해 주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장 원장도 "일본처럼 불리한 펀드 조성에 동의하는 방향으로 협의를 마무리 지어서는 안 된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펀드 규모를 조정하거나, 추가적인 보상 조항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재협의를 시도하는 방향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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