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광주 첫 학생 비밀결사 성진회…학생독립운동 산실이었다 [광주전남독립운동현장]
1926년 11월 광주고보·농업학교 16명 사회과학 학습 모임체 구성
"독립쟁취, 노예교육 반대" 강령 , 강석봉 등 사회주의 청년에 영향
왕재일, 장재성, 박인생 등 흥학관 멤버 주도…하숙집 인연으로 묶여
충북, 경북, 제주 등 출신지 다양…4~5개월만에 돌연 해산 선언

1926년-. 그해는 몹시도 추웠다.
1910년대 일본에서 풍미한 사회주의, 자유주의적 사조인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막을 내렸다. 군부와 우익 세력이 전면에 등장하고, 12월에는 쇼와 (昭和)시대가 열렸다. 1925년에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일본 내 사회주의 세력과 조선 독립운동 세력을 직타했다.

#서남리 하숙집에 모여드는 학생들
그해 11월3일 수요일이었다. 학교를 마친 10여 명의 학생들이 하나 둘 광주군 광주면 서남리 최동문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2학년인 최규창의 하숙집이었다. 지금의 동구 서남동으로 흔히 '구시청 사거리'일대다.
인근에 청년 문화공간이자 진보적 사회단체가 입주한 흥학관과 광주면사무소가 자리했다. 광주고보에서 왕재일·장재성(5학년), 안종익·채영석·김광용(4년), 국순엽(3년) 임주홍·최규창·김창주(2년), 정우채(1년) 등 10명이 참석했다. 광주농업학교는 정남균·정동수·박인생(5년), 문승수·정종석·김한필(4년) 등 6명이 모였다.
모임은 왕재일, 장재성, 박인생이 주도했다. 왕재일은 장재성과 동기였지만, 4세 연상이었다. 전남 구례 출신인 왕재일은 숭일학교를 중퇴하고, 광주청년회가 흥학관 내에 개설한 청년학원의 고등과를 마치고 1923년 광주고보 2학년에 편입했다.
이들 주도자 3명은 흥학관에 출입하면서 사회주의에 공명하며 반일 투쟁체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당시 흥학관에는 광주청년회, 전남청년연맹, 광주노동공제회 등 10여 개 단체 사무실이 있었다.
#16명 결사체 회원들 출신과 인연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은 이런저런 인연으로 묶여 있었다. 왕재일, 문승수, 정동수는 광주지역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인 강석봉의 집에 하숙했다. 정종석은 강석봉의 동생인 강해석 집에 하숙해 이들은 강 씨 형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동수는 "민족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사회인이나 학생을 막론하고 자주 들락거렸다"고 회고했다. (월간 '예향 '1989년 11월호)

#반일 조직적인 모임 강령 등 정해
최규창 하숙집에 모인 16명은 사전 협의한 대로 신속하게 조직화 작업을 진행했다. 왕재일이 독청독성(獨淸獨醒)에서 '성'자와 진격진군(進擊進軍)의 '진'자를 딴 '성진회'를 제안했다. 이어 3대 강령을 채택했다.
▲일제의 기반 아래서 한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일본 식민 통치 하의 조선 교육 제도) 철저히 반대한다.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요구한다.
회원들이 지켜야 할 의무로 5가지를 결정했다. ① 사회과학 연구에 매진한다. ② 비밀 유지(비밀엄수) ③ 신문·언문(한글)·언문신문 숙독 (언문신문 읽기) 등을 통한 교양 함양. ④ 동지(新會員) 포섭 또는 동지 획득 및 상호 연락, 동지 확대. ⑤ 정기적 보고 및 토의, 각 학교·반 단위의 교육 실정 보고 및 검토.
총무에 왕재일, 회계 장재성, 서기 박인생을 선임했다. 회비는 월 10전씩 내기로 하고, 매월1,3째주 토요일에 정기모임을 갖기고 했다. 사회과학(사회주의 이론 포함) 연구·독서·토론을 정례 활동으로 삼고, 격문·전단 제작·배포를 통해 대중·학생 계층에 선전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성진회 조직의 배후는 누구인가
광주 고교 연합 비밀결사체인 성진회를 누가 조직했는가를 두고 여러 설이 나뉜다.
첫째, 강석봉 배후설이다. 광주 3·1운동을 주도하고, 1923년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신우회를 결성했던 강석봉이 조선공산당의 지침에 따라 학생 조직을 결성했다는 설명이다. 주요 배후인물로는 조선공산당 중앙 검사위원장 후보로 선출된 강석봉을 비롯하여 강해석, 지용수, 한길상, 장석천, 강영석 등이다.
강석봉은 3차 조선공산당, 즉 ML당 광주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ML당 하부조직으로 노동부, 농민부, 청년부(Y부) 등이 있었는데, Y부에 청년 학생 조직이 구축됐다는 것. 박해현 초당대교수는 "조선공산당 Y부가 항일운동과 민족독립을 위해 투쟁해 나갈 민족지도자로서의 역량을 함양시키기 위해 성진회를 지도했다" 면서 "강석봉이 성진회 결성 기초를 닦았다"고 밝혔다.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정우채' 글 참조)
1930년 광주고보 백지동맹 주역이자, 2학년 독서회 비밀회원이었던 이기홍 선생도 회고록을 통해 성진회 결성과 조직 운영에 ML당 Y부가 관여했다고 증언했다. 또 이종률 선생도 "1926년 8월 서울 공학회 간부인 김창수(휘문고보)가 지방학생 지하단체 조직의 오르그나이저로 내광하여 공학회 간부인 최규창 집에서 성진회 결성을 논의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김성민 지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145쪽 참조)
다만, 김성민 박사는 이종률의 증언에 대해 김창수가 광주에 올 상황이 아니었으며, 당시 1학년인 최규창이 집행책을 맡은 위치에 있지 않은 점 등을 들어 다른 조직과 혼동한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둘째, 학생 자체 주도설이다. 광주고보 왕재일과 장재성, 광주농업학교 박인생이 사회주의 사상에 서로 공명해 독립운동의 비밀 조직으로 양교 학생들을 규합했다는 것이다.
1930년 7월 26일 재판 기록인 '성진회 예심종결서'에 기록돼 있다. 왕재일 자신도 "물리, 화학 등 자연과학의 미교육, 야학교육하던 남정욱 퇴학 사건에 자극받아 결성했다"고 회고했다.
성진회 회원이었던 임주홍도 "인간적인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적 생활을 영위할 것을 희망함으로써 자연과학 뿐 아니라, 사회과학도 포함한 광범위한 과학을 연구할 목적으로 성진회를 조직했다"고 주장했다. (1932년 사상월보11월호 '진정서 '참조) 이들의 주장은 인간적인 문화적 생활, 즉 식민지 체제를 벗어나기 위해 과학적 학습을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
셋째, 민족주의계의 지도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자인 이기호 선생은 "독서회는 당시 학생층에서 전국적으로 유행처럼 번지며 조직된 것"이라면서 "일제가 성진회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왜곡, 날조하기 위해 공산당이 관여한 것으로 꾸민 것"이라고 밝혔다. (이기호 편저 '광주학생독립운동정사' 참조)
1920년대 최초의 학생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성진회는 돌연 1927년 3월 해산하고 만다. 차돌처럼 단단한 사회과학으로 무장하고, 용광로처럼 뜨거운 민족애로 뭉친 16명의 전사들은 왜 4개월만에 흩어지고 말았을까.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 광주시 동구 서남동 일대 (최규창 하숙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