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평생 투쟁한 재일제주인 김석범, 그의 삶과 문학

1925년생, 올해 나이 100세. 제주를 고향으로 여기는 재일 작가 김석범의 신간이 나왔다. '보름달 아래 붉은 바다'(소명출판)는 세 편의 단편과 대담으로 이뤄져 있다. 일본에서는 2022년에 발간된 책이다.
▲소거된 고독 ▲보름달 아래 붉은 바다 ▲땅의 동통 등 단편 세 편의 공통점이라면 김석범 본인이 등장인물 K로 등장한다.
'소거된 고독'은 젊은 시절 K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기까지 겪은 방황의 시간을 그린다. 일본공산당에 투신했지만 이내 탈퇴하고, 센다이·도쿄·오사카 등을 떠돌면서 한때 동지였던 사람들과도 만나고 헤어지는 지난한 시간을 지나 4.3 소설 '까마귀의 죽음'을 발표하는 과정을 그린다.
특히 제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던 삼당숙모와 고문으로 유방이 잘린 Y녀를 만나며 들었던 섬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큰 영감을 안겨주는 사건이다.
보인다. 쓰시마 밤의 칠흑 같은 어둠의 밑바닥이 보인다. 유방이 없는 여자. 진눈깨비 내리는 센다이역 앞에서 이별한 고한. 일본에서의 임무를 다하고 십 년 후에 '북'으로 '귀국', 당의 요직에 앉지만 이내 숙청, 총살. 불그스름한 철광산 정상에서 다이너마이트로 자살한 정우. 혁명, 신의 나라가 폭약의 파편이 되어 허공에 비산한다. 서울 북부 북악산 자락에 메아리친 총성 아래의 장용. 보인다. 허공 저편 어둠 속 빛의 광장에 스무 살 그의 얼굴이 보인다.
- '소거된 고독' 55쪽 가운데
포장마차를 인수했지만 운영에 실패하고 가계에도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혁명가도 되지 못하는 "쓸모없는 인간, 혁명조직에서 탈락한 패배자"였던 김석범.
그는 K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이 "'까마귀의 죽음을 씀으로서 소설 인생의 황하를 홀로 걷는 무無의 출발점에 선다. 그 황량함 위에 서게 한 배후의 힘은 센다이에서의 좌절이고, 학살의 섬에서 밀항해온 이들과 보낸 쓰시마에서의 하룻밤이다. 또 해방 후 4년에 걸쳐 교환한 벗과의 편지와 그 벗의 죽음이고, 그것은 K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였다"고 고백한다.
'소거된 고독'이 젊은 시절의 김석범이 작가로 굳건히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그렸다면, 단편 '보름달 아래 붉은 바다'는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재일한국인 영이라는 젊은 여인이 어느덧 "선생님"으로 불리는 K를 만나면서 '디아스포라'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와 맞물려 김석범의 대표작인 대하소설 '화산도'의 뒷이야기인 일종의 시퀄(Sequel)을 통해 4.3 당시 '수장' 사건을 조명한다.
숙취와 피로가 뒤섞인 상황에서 K는 "염분이 짙고 끈적끈적한 바다 밑 양수 냄새"를 떠올리며, '화산도'의 시퀄 작품인 '보름달 아래 붉은 바다'를 소개한다.
간조의 바다는 이윽고 만조가 됐고, 폭포 아래 잠겨 있던 시체 무리를 먼바다로 휩쓸어 갔다. 차츰 바다도 피로 물들었고 주변은 보름달 달빛 아래 꿈틀거리는 피바다가 됐다. 그리고 그 바다 위로 보름달이 일그러진 채 떠 있었다.
- '보름달 아래 붉은 바다' 179쪽 가운데
마지막 '땅의 동통'은 마치 여행기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화산도' 2부 취재를 위해 42년 만에 제주를 방문했던 1988년과 세계한인문학인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찾아왔던 1996년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품에서는 아직 사복경찰이 은밀하게 감시했던 1988년 한국에서, K가 조우했던 혼란스러움과 착잡함이 잘 드러난다. 특히, 지방직 고위공무원이었던 육촌 동생과의 어색한 통화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효는 충에 앞선 최상의 덕이다. 충효가 아니다. 효충이다. 그러나 이는 과거의 말이다. 1948년 4.3학살 당시에는 부모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 이상의, 육친의 학살 유해를 육친이 매장했다. 학살자 앞에서 육친이 육친을 죽인다. 학살된 시체는 모두 반공 입국의 국시에 반한 폭도, 빨갱이, 어린아이도, 임산부의 배에 깃든 태아도 빨갱이의 씨. 빨갱이의 씨를 남기지 않기 위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도 죽여 버린다. 이것이 1948년에 건립된 대한민국의 제주, 세계로부터 닫힌 밀도에서 수만 도민이 이런저런 형태로, 즉 레드헌터의 형태로 사람을 물건 취급당하며 살해됐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제주다.
- '땅의 동통' 243쪽 가운데
'땅의 동통'에서는 꿈과 현실을 오가면서 K의 시선이 '화산도'의 주인공 이방근의 시선으로 바뀐다. 제주 뿐만 아니라 광주, 서울에서 보고 느낀 현실과 '화산도'의 장면이 교차하면서, 소설은 작가가 지닌 역사관을 상징적으로 강조한다. 특히 학살과 탄압의 시간을 지나 어느덧 4.3을 자유롭게 꺼내 공유하는 시대 변화를 마주하면서, 언젠가 자신이 바라는 순간이 오리라는 기대를 한껏 담아낸다.
이렇게 소설집 '보름달 아래 붉은 바다'는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면서 김석범이라는 제주인이자 재일조선인이 어떤 마음을 품고 글을 썼으며 4.3이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본인의 삶으로 보여준다. 김석범이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한 독자에게 유익한 책이 되리라 본다.
바다울림, 땅울림과 함께 제주는 4.3해방으로 나아가고 있다. 영원히 침묵할 것 같던 동토는 깊은 땅울림과 함께 녹기 시작하고, 한없이 죽음에 가까운 뒤틀린 기억 뭉치가 풀어지며 불덩어리가 되어 분출, 정뜨르 땅은 갈라지고 찢기며 그 틈새로 내리쬔 햇살과 함께 나타난 백골들. 서로 모양을 이루고 이어져 해골들이 떼를 지어 춤추기 시작할 것이다. 춤을 추기 시작한다. 두탕탕, 두탕두탕, 두탕탕…….
- '땅의 동통' 358쪽 가운데
소설집 후반부를 채우는 대담은 김석범의 '과거로부터의 행진' 등을 담당했던 일본 잡지 '세카이' 전 편집장 오카모토 아쓰시와의 2022년 대담이다.
책 번역을 맡은 조수일 한림대 일본학과 조교수는 책 말미에 김석범의 근황을 전했다. 올해 100세를 맞았지만, 지난해 일본 월간 매체에 단편소설 '명순과 기준', '만덕이 유령'을 발표하고, 또 새로운 단편을 집필 중이라는 놀라운 소식이다.
조수일 조교수는 "신념을 관철해온 자세와 창작에 대한 집념, 무엇보다 말살당한 기억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처절한 울부짖음이라 할 수 있는 4.3에 대한 반복적 재현은 현재진행형이다.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한다"고 인사를 남겼다.
'반反권력'을 평생에 걸쳐 잘 실천해왔다고 생각해요. 조국의 '남'과 '북', 일본의 문단과도 거리가 있고, 말하자면 사면초가지요. 해방 후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일본에 갔다 한 달 후에 돌아오겠다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오래 살아서 문학으로 평생을 싸워 왔습니다.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어요. 권력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저한테는 살아갈 힘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강한 사람이에요. 다소 센티멘털한 것으로는 꺾이지 않아요. 소설 쓰기를 계속하면서 정신력이 강해진 겁니다.
- 대담 '이것만은 꼭 써야 한다' 384쪽 가운데
390쪽, 소명출판, 1만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