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대통령, 외환위기 재발 우려 왜? …글로벌 금융위기 확산 가능성도 [홍길용의 화식열전]
“안전장치 없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경우 한국 경제가 1997년 외환위기 못지 않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관세를 무기로 앞세운 미국의 무리한 투자 요구에 대한 이재명 대통령의 최근 발언(로이터 인터뷰)이다. 이 대통령의 발언 배경은 뭘까? 엄살일까? 아니다. 실제 그렇게 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지난 4일 일본은 5500억 달러를 미국이 원하는 곳에 투자하기로 했다. 미국이 투자처를 정하면 일본은 45일 이내에 자금을 집행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내에 이 돈을 모두 투자 받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 입장에서는 5500억 달러를 단기간에 준비해야 한다. 원금 회수 때까지는 이익을 미국과 5:5으로 나누고 원금 회수 이후에는 1:9로 이익을 나누기로 약정했다. 기업에게는 어려운 투자다. 정부가 외환보유고를 털어서 마련해야 한다.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미국은 관세를 추가로 부과할 수 있다.
미국은 한국에도 같은 조건으로 3500억 달러를 투자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1조 3000억 달러로 한국(4150억 달러)의 3배가 넘는다. 무엇보다 일본은 미국과 무제한 통화 스와프(swap) 협정을 맺고 있다. 달러가 필요하면 미국 연준에 엔화를 맡기고 무제한으로 조달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달러가 부족해질 우려가 없다. 한국은 미국과 이 같은 협정을 맺고 있지 않다. 단기간에 외환보유고의 80%를 털어서 미국에 넘기면, 달러 부족 우려가 커져 외국인 자금이 이탈하고 원화가치가 폭락(환율 급등)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우려한 게 이 부분이다.

지난 7월 한미 통상협상에서 우리가 무려 3500억 달러 투자를 미국에 약속한 이유는 뭘까? 경제규모가 우리나라의 3배인 일본이 5500억 달러를, 10배 큰 유럽연합(EU)은 6000억 달러를 약속한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큰 액수다. 정부는 1500억 달러를 마스가(MASGA,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에, 2000억 달러는 반도체나 원자력 에너지 등에 투자하면 우리의 전략 산업 거점을 미국 내에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투자 기간도 길게 잡고, 투자 방식도 현지에서 금융을 일으키면 국책은행 등이 이를 보증하는 방식을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 큰 제안으로 미국의 환심을 사면서 실속도 챙기겠다는 계산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일본과의 협정을 통해 미국의 계산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는 점이 확인됐다. 최근 우리 정부는 미국에 부랴부랴 무제한 통화 스와프 협정 체결을 요청했지만 성사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미국이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한 통화는 유로, 영국 파운드, 일본 엔, 캐나다 달러, 스위스 프랑이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24시간 활발히 거래되는 일명 기축통화들이다. 달리 표현하면 언제든 쉽게 환전이 가능한 통화다. 한국의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이지만 원화는 거래시간이 제한돼 국제 외환시장에서는 잘 거래되지 않는다. 외환위기로 곤혹을 치렀던 경제관료들이 외환관리를 엄격히 한 탓이다. 한국 주식시장(KOSPI)가 선진 지수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외환위기 때보다 경제규모는 엄청나게 커졌지만 외환시장은 온실 속 화초로만 다뤄온 대가다. 엄밀히 말해 스와프 체결을 미국 정부에 요청했지만, 통화 협정의 체결 주체는 중앙은행, 즉 연준이다.
유럽연합도(EU)는 유럽 기업들이 향후 3~4년간 미국 내 인공지능, 에너지, 고급 제조업 등 전략 부문에 6,0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EU가 직접 투자하겠다는 약속이나 구체적인 세부 계획을 명시하지 않았다. EU의 특성상 회원국 별로 투자액을 나누고 이를 다시 기업 단위로 배분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명분이다. 일본에서 성공의 맛을 본 트럼프가 한국에 이어 유럽에도 같은 압박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 EU를 압박하지 않으면 한국도 트럼프에 버틸 명분으로 내세울 수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인 상호관세 부과에 대한 위법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일단 위헌 판결이 나오면 트럼프가 다른 나라에 투자를 강요할 명분이 사라진다. 섣불리 무리한 투자 약정에 서명하면 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해 상호관세가 무력화되어도 되돌릴 수 없다. 내년에나 결과가 나오겠지만 일단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일정 기간 고율의 관세를 감당해야 한다.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외환위기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외환관리를 제대로 못한 아시아 각국의 탓도 있지만 미국의 경제정책도 주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1991년 경기침체 이후 미국은 수년간 저금리 정책을 펼쳤다. 1993년부터 경제성장세가 뚜렷해지면서 연방준비제도(Fed)가 경기 과열 가능성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1994~1995년 연준은 기준금리를 3%에서 6%까지 빠르게 인상했다. 달러화가 강세를 보였고, 단기 외채에 의존하고 있던 아시아 각국에서는 외화 유출, 환율 급등, 단기외채 부담 증가 등 심각한 금융 불안이 촉진됐다. 1997년의 한국도 그 중 하나였다.
반대로 우리가 외환위기를 겪던 1998~2000년 미국 경제는 3년 연속 4%대 성장률을 기록하며 실업률은 낮고 인플레이션도 안정적인 ‘골디락스’ 환경을 유지했다. IT 및 인터넷 기업 중심의 ‘신경제(New Economy)’ 붐에 힘입어 자산 시장과 소비·투자가 강세를 띠었다. 아시아·신흥국 통화 가치가 급락하고 자본이 이탈하면서 세계 투자자들은 안전한 미국 주식·국채로 대거 자금을 이동시켰다. 인터넷 혁명과 겹치며 미국 주식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결국 ‘닷컴 버블’로 이어졌다. 외환위기를 겪은 아시아·신흥국과 버블 붕괴의 고통을 맛본 미국의 경제는 2000년대 초반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며 빠르게 회복된다.
트럼프의 강요된 투자가 글로벌 금융시장의 혼란을 초래해 미국 경제에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대미 투자자금 마련을 위해 일본이나 EU, 한국이 단기간에 해외자산을 대규모로 처분하면 자산가격이 급락할 수 있다. 지난 해 8월 글로벌 증시 폭락을 낳은 엔 캐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 청산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일본과 EU는 미국 국채 최대 투자자다. 이들이 달러 마련을 위해 미국 국채를 대규모로 매도하면 장기금리는 상승압력을 받게 된다. 대규모 달러가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면 단기금리는 하락하고 물가는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 모건스탠리 등도 “(트럼프의 강요된 투자가 현실화되면) 정상적인 위험분산 구조가 붕괴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중국 경제가 부상하며 글로벌 경제가 회생의 기회를 가졌지만, 미중 갈등이 심각한 지금은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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