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휘의 시네필] 가부키와 만난 이상일의 작가주의

조재휘 영화평론가 2025. 9. 2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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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能)와 다도(茶道) 같은 일본의 여러 전통문화가 그러하듯, 가부키(歌舞伎) 집안에는 이른바 '습명'(襲名)이라는 관습이 있다.

가문의 후계자가 대대로 내려오는 선대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고 공연에서 맡던 배역까지 이어서 연기하게 되는데, 주로 피를 나눈 혈연에만 기예(技藝)를 전수하는 이러한 모습은 일본 전통문화의 폐쇄성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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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2025)’

노(能)와 다도(茶道) 같은 일본의 여러 전통문화가 그러하듯, 가부키(歌舞伎) 집안에는 이른바 ‘습명’(襲名)이라는 관습이 있다. 가문의 후계자가 대대로 내려오는 선대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고 공연에서 맡던 배역까지 이어서 연기하게 되는데, 주로 피를 나눈 혈연에만 기예(技藝)를 전수하는 이러한 모습은 일본 전통문화의 폐쇄성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상류계급인 가부키 가문들의 보수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좀처럼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배움이 허락되더라도 외부인에게는 어느 선까지 들어가면 그 이상의 비전은 가르쳐 주지 않는 문외불출(門外不出)의 유리 벽이 쳐져 있다.

이상일의 ‘국보’(2025)는 키쿠오(요시자와 료)와 ��스케(요코하마 류세이) 두 사람 간의 긴 세월에 걸친, 우정과 대립을 오가는 관계의 양상을 그린다. 나가사키 지역 야쿠자 집안의 자식인 키쿠오는 집안이 적대조직에 습격당해 몰락하면서 아버지의 지인으로 카미가타 가부키(上方歌舞伎·오사카, 교토를 중심으로 발전한 가부키) 명문가의 당주인 2대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에게 거둬진다. 후계자가 될 예정인 ��스케와 함께 문하생으로 키워지면서 키쿠오는 온나가타(女形·여성 역을 맡는 배우)로서의 재능을 만개시킨다.

문제는 하나이 한지로가 자신의 뒤를 이을 3대 하나이 한지로의 이름과 지위를 혈육이 아닌 제자 키쿠오에게 습명시키고자 한데서부터 발생한다. 가문 밖에서 입양된 자에게 집안의 명예와 이름을 물려줄 수 있는가를 두고 벌어지는 첨예한 갈등과 긴장은 친밀한 사이였던 두 사람의 관계가 벌어지는 계기로까지 비화한다.

‘국보’는 1964년부터 현재로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시간대만큼이나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스펙트럼이 넓은 영화이다. 피를 넘지 못하는 재능과 재능을 이기지 못하는 피의 대결이기도 하면서, 전통과 집단의 권력이 소수자적 개인에게 가하는 압력에 관한 이야기이고, 한편으로는 마침내 혈통의 한계를 뚫고 인간국보(무형문화재 전수자)가 되었지만 그러한 인간 승리의 이면, 궁극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미명하에 주변을 희생시키는데 무감각해진 괴물이 된 키쿠오 만년의 귀결을 통해 일본적 탐미주의가 지닌 파멸적인 속성을 넌지시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욕의 과잉은 장장 175분에 달하는 대작의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 비약과 축소가 잦아지면서 드라마의 전개가 거칠어지는 결점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재일한국인의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건 데뷔작 ‘아오 �l’(1999) 외에는 없지만, 이상일의 필모그래피는 그로부터 발원하는 문제의식을 일본 사회 내의 다른 타자들, 소수자성에 빗대어 우회적으로 풀어내 온 노정(路程)이었다. 리메이크판 ‘용서받지 못한 자’(2013)와 ‘분노’(2016)를 거쳐 ‘유랑의 달’(2022)에까지 이어지는, 세상의 보편으로부터 차별받는 소수를 조명하고자 한 작가주의의 일관성은 ‘국보’에 이르러 가부키라는 소재가 지닌 특유의 아름다움, 엄격하게 통제된 영화 언어의 세련됨과 어우러지면서 큰 대중적 폭발력을 갖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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