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기 전날, 정원은 더 크게 흔들렸다”… 결코 낯설지 않은 추상을 만나다

제주방송 김지훈 2025. 9. 2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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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껍질로 다시 태어난 김미지의 ‘Moving White Garden–Yeon dong’
평면의 상상, 공간의 진동이 전율하던 날
김미지 作 (측면 전경) 와이어에 매달린 흰 껍질들이 공기의 흐름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


22일 저녁, 담소 창작스튜디오 3층 갤러리.
공중에 매달린 흰 껍질들이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습니다.
구름으로 흩어지고, 깃털로 내려앉으며 다가서는 발걸음과 호흡에 따라 미세하게 떨립니다.

단단해 보이면서도 금세 흩어질 듯 위태로운 풍경.
순간, 정원은 하나의 오브제에서 살아 있는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작품을 바라보던 작가는 말합니다.
“평면 속 정원은 늘 상상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공간 속에서 떨리고 빛을 머금으니 나조차 낯설 때가 있다. 정원은 정지된 조형물이 아니라 순간마다 다시 태어나는 장면이다.”

김미지 作 (작품 클로즈업) 핫멜트 껍질이 실타래처럼 얽히고 흩어지며 빛을 머금은 모습.


■ 곶자왈 설경으로 겹치는 추상

작품은 특정한 자연을 직접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흰 껍질들이 모여 있는 장면은 누구에게나 풍경으로 되살아났습니다.
곶자왈 숲의 설경, 안개 낀 해안의 파동, 서리 내린 새벽 들판의 결로 저마다 기억 속 자연이 겹쳐 들어왔습니다.

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합니다.
“제주의 자연은 너무 강렬하다. 곶자왈을 걸으며 느낀 설경의 떨림이 저절로 들어왔다. 추상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자연의 감각과 겹치면서 현실로 스며들었다.”

그 말처럼 작품은 낯설면서도 동시에 익숙한 추상으로 남았습니다.
바스러질 듯 견고한 껍질들의 풍경은 기억을 흔들어 깨우며, 각자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자연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풍경은 전시장을 떠난 뒤에도, 마음속에서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갤러리 한가운데 설치된 ‘Moving White Garden–Yeon dong’ 전경.


■ 쓰레기에서 정원으로, 핫멜트의 변주

작가가 붙잡은 것은 값싼 공업용 접착제, 핫멜트(Hot Melt) 였습니다.

남편(이지현 작가)의 작업을 돕던 중 바닥에 떨어진 잔해가 햇볕에 반짝이는 순간, 거기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버려진 게 나 같았다. 그런데 햇볕을 받아 반짝일 때, 새로운 빛을 품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가녀린 체구, 핫멜트를 녹일 글루건조차 들 수 있을까 싶은 여린 손끝에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손은 기어코 공업용 재료를 녹이고, 감싸고, 뜯어내는 지난한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핫멜트는 쓰레기가 아니라 그의 삶과 감정의 흔적이자 또 다른 언어가 되었습니다.
“작은 파편 하나를 집어 들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다는 해방감을 느꼈다. 싸구려 재료였는데도 내 감정을 얹으니 무한히 확장되는 언어가 됐다.”

그렇게 모이고 이어진 껍질들은 전시장 전체를 흰 정원으로 바꾸었습니다.
기포가 남은 표면, 갈라진 결, 빛을 머금은 반투명한 질감은 물질의 경계를 넘어, 켜켜이 쌓인 시간과 돌봄이 겹쳐 남은 피부였습니다.

■ 진짜 자신을 향한 바람과 욕망

껍질을 뜯어내고 이어 붙이는 지난한 과정은 단순히 반복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진짜 자신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늘 다른 이들을 돕고, 아이와 가족을 위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정작 내 자신은 어디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마음을 흔들었다. 이번 정원은 결국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무대였다.”

그렇게 버려진 껍질은 자투리이자 또 다른 ‘나’였습니다.
반짝이는 파편에서 정체성을 찾고자 했고, 그것이 예술가로서의 근원적 열망이 되었습니다.

■ 노마드(Nomad)의 흔들림, 존재의 방식

작가의 삶은 정착보다 이동에 가까웠습니다. 대구에서 태어나 중국과 파주를 거쳐, 지금은 제주의 연동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늘 이동했고, 흔들리며 나를 찾아야 했다. 이번 정원도 그런 내 삶처럼 흔들리는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

작품은 바퀴가 달린 열린 구조로 제작됐습니다.
관람객의 기척과 공기의 흐름에 따라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그 흔들림은 불안정의 은유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자 작가의 초상이었습니다.

프레임 안에 흩어지듯 채워진 흰 껍질 설치작품.


■ 과정이 곧 예술

김미지 작가는 본래 회화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평면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작품은 전시가 끝나면 해체된다. 살아 있는 동안만 존재한다. 그 점이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든다.”

핫멜트를 붙이고 떼어내는 반복적 노동은 돌봄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육아와 가사로 20년 가까운 공백을 겪은 그는 그 멈춤조차 재료로 삼았습니다.
“버려진 껍질들이 정원으로 다시 태어나듯, 멈춤도 결국 창작으로 변환된다.”

■ 끝나기 전날, 생명의 떨림

전시 마지막 날을 앞두고, 작가는 SNS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전시는 늘 적응할 때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끝이 난다. 덩어리로 있던 정원을 숲의 뒤엉킨 가지처럼 선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움직이는 프레임도 확장하고, 생각한 것을 현실로 옮기며 가능성을 확인했다.”

현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미 내년 연말 설치전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더 큰 스케일의 움직이는 정원을 만들고 싶다. 어떤 공간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거닐 수 있는 정원도 만들고 싶다. 내 삶의 흔적이 또 다른 정원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끝나기 하루 전날, 와이어에 걸린 껍질들은 마지막 힘을 다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평면에 머물던 상상은 현장에서 살아 있는 존재로 말을 걸었고, 곶자왈의 설경과 바람의 속삭임, 기억 속 풍경으로 겹쳤습니다.

사라짐을 앞둔 순간에야 가장 또렷해지는 생명의 떨림.
정원은 마지막까지 살아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전시 포스터. ‘Moving White Garden–Yeon dong’, 6~23일, 담소 창작스튜디오갤러리.


■ 시간이 남긴 정원

대구 출신의 작가는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습니다.
결혼과 육아로 20년 가까운 공백을 겪은 뒤 다시 붓을 들었고, 서울과 대전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며 복귀했습니다.
2022년 담소미술창작스튜디오 우수작가로 선정되며 주목 받았고, 현재 제주자치도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제주미술대전 작가상을 수상하고 개인전을 이어가며 꾸준히 작업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평면에서 입체와 설치로 이어진 궤적은 장르의 전환만이 아니었습니다. 살아온 시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방식이자, 버려진 것들을 새롭게 길어 올리는 행위였습니다.
값싼 접착제를 붙이고 떼어내는 지난한 과정에서 버려진 잔해를 일구고, 흔적을 모아 자신만의 풍경으로 바꿔왔습니다.

그의 ‘정원’은 화려한 성취의 축적이 아니라 멈춤과 흔들림, 돌봄과 바람이 켜켜이 겹쳐 남긴 시간의 결이었습니다.
정원은 자신을 다시 세워온 삶의 증거로, 오늘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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