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 한미 관세 협상 2막… 美 대법원 판결 ‘변수’

강승구 2025. 9. 22.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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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율 조정 마친 뒤 투자 구조 협상 교착
美, 전례 없는 현금 투자 요구
대법원 판결·반이민 정책 등 대외 변수 겹쳐
전문가 “장기전 불가피, 보복 대비 신중 대응 필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한미 관세 협상이 관세율 조정을 끝내고 세부 합의 논의에 들어가면서 협상의 새로운 막이 올랐다. 미국은 사전에 합의된 3500억달러(490조원)의 대미 투자를 현금으로 집행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런 요구가 한국 경제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기류도 달라졌다. 지난 7월 30일까지는 관세율 인하에 초점을 맞춰 속도전에 나섰다면, 이제는 세부 합의에 들어서며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다가오는 미 연방대법원의 판결도 변수로 떠오른다.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 위법 여부에 대한 연내 판결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국제사회에도 파장이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관세 협상이 비관세·외교·군사 변수까지 얽힌 만큼 장기전에 대비해 미국의 보복을 피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2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한미 관세 세부 합의는 대미 투자 성격과 구조를 두고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아 교착 상태에 빠졌다.

앞서 양국은 상호·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고, 한국이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를 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김정관 산업부 장관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잇따라 만나 세부 합의를 조율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3500억달러 현금 지원 압박

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직접 투자 비중을 두고 미국은 확대를, 한국은 보증을 통한 부담 완화를 주장한다. 투자 대상을 정하는 문제에서는 미국이 주도권을 고집하지만, 한국은 기업의 사업성 검토를 앞세운다. 수익 배분 구조 역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미국은 일본식 모델을 내세우고, 한국은 수용 불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이 요구하는 3500억달러 현금 투자는 전례 없는 규모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전 세계에 집행한 해외직접투자(FDI) 총액이 3489억달러로 요구액보다 적다. 역대 대미 FDI 누적 규모(2563억달러)와 비교해도 1000억달러가량 많다. 8월 말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163억달러다. 이 상태에서 대미 투자 재원을 마련할 경우 국가신용등급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정부는 최후의 카드로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꺼내 들었지만, 현실화는 쉽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한미간)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3500억달러를 인출해 전액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우려를 밝혔다.

한국과 미국은 관세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목표로 세부 협상을 이어갈 방침이다. 여한구 본부장은 23일부터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아세안경제장관 회의에 참석해, 체류 기간 중 그리어 대표와 후속 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 16일 세종시 장군면 한식당에서 산업부 출입기자단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산업부 제공]


◇속도전에서 숨 고르기로 전환

다만, 이전에 비해 정부의 협상 기류는 달라졌다. 7월 30일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유럽과 보조를 맞추며 큰 틀 합의를 서두르는 ‘속도전’에 나섰지만, 지금은 미국 내 상황과 국내 여론을 살피며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도 최근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미국이 25% 관세를 부과해도 (우리 수출 피해는) 3500억달러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라며 “속된말로 트럼프 임기 동안 피해 기업에 관세 보조금을 지급하며 버티자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며 솔직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어 “관세 협상의 내용을 보면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가 우리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판단이 될 수 있다”라며 “지금은 합리성과 거리가 먼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하고 있는데 작은 것 하나라도 정성을 들이면 우리나라한테 조금 더 나은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미국을 오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 현안에 밝은 한 통상 전문가는 “세부 합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이미 수용했지만, 현 상황은 변수가 너무 많다”라며 “미국 정부가 과연 일관성 있게 정책을 실행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전문직 취업 비자(H-1B) 수수료 인상은 사실상 외국인 노동자 유입을 막겠다는 신호”라며 “미국 제조업은 우방국 노동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온쇼어링을 추진하면서도 노동력 유입을 제한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윌라드 호텔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의 발언을 듣고 있다. 왼쪽부터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이 대통령,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연합뉴스]


◇H-1B 비자 규제·IEEPA 권한 다툼, 관세 무효화 가능성도

이처럼 미국 내 변수는 적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현지시간) 전문직 취업비자(H-1B) 발급 수수료를 1000달러에서 10만달러로 100배 올리는 포고문에 서명했다. 세계 각국의 첨단 기술 인력이 미국 빅테크 취업에 주로 활용해 온 H-1B 비자에도 규제가 강화되면서, 미국의 반이민 기조가 한층 뚜렷해졌다. 대미 투자 확대를 요구하는 미국이 정작 이민 정책을 강화하면서 부처 간 정책 혼선까지 노출하고 있다. 한국으로선 불확실성이 한층 더 커진 셈이다. 통상 전문가는 “관세 협상에서 미국은 여건을 마련해 주지 않은 채 대통령과 참모진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는 협상이 힘을 받기 어렵기 때문에, 당분간은 관망하며 미국 측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세계 각국에 부과한 ‘상호관세’의 위법 여부를 다투는 미 연방대법원 판결도 관건이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11월 5일 심리하기로 했으며, 행정부 요청에 따른 신속 심리로 연내 결론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쟁점은 트럼프 대통령이 1977년 제정된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대규모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지 여부다. 1·2심은 IEEPA 권한을 ‘수입 규제’로 한정해 관세 부과 권한은 인정하지 않았다. 헌법상 관세 권한이 의회에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대법원이 하급심을 유지할 경우 한국산 제품에 부과된 15% 상호관세는 무효화된다.

대법원의 성향도 변수다. 전체 9명 가운데 6명이 보수 성향이며, 이 중 3명은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했다. 실제로 대법원은 지난해 7월 전직 대통령의 공적 행위에 대해 광범위한 형사 면책 특권을 인정해 트럼프 관련 재판 절차를 중단시키는 등 보수 진영에 유리한 판결을 내려왔다.

송영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헌법상 관세 권한은 의회에 있다는 점에서 1·2심 판결은 명확하다”면서도 “대법원의 보수 성향을 고려하면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대법원이 무리한 판단을 내릴지는 미지수지만, 한국은 11월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산적한 변수 속에 한국의 관세 후속 협의는 험로를 예고한다. 전문가들은 미국 상황을 관망하면서 관세 협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되, 보복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통상 전문가는 “정부가 보조금을 줘 산업을 돕자는 방안이 거론되지만, 핵심은 미국의 보복 가능성”이라며 “관세에 그치지 않고 비관세 규제, 외교, 군사적 압박까지 이어질 수 있어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신중한 협상 전략이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세종=강승구 기자 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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