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67) 문두루비법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이기고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해서 두 나라를 물리치면서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직접 통치하면서 신라까지 집어삼키려는 욕심을 드러냈다.
신라의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은 당나라의 야욕을 눈치채고, 당나라 군사와의 전쟁에 나서 기벌포전투에 이어 매초성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당나라를 신라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당당히 삼국통일을 완성했다.

◆신화전설 1: 문두루비법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쳤으나 당나라 유격병과 장병들이 주둔지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하려 하자 문무왕이 이를 깨닫고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당군의 전쟁이 벌어졌다.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군사들은 곳곳에서 당나라 군사들을 이기고 기어이 신라에서 당군사들을 모두 축출하면서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이에 당나라 고종이 사람을 시켜 당에 머물고 있던 김인문 등을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거늘 어찌하여 우리 군사를 해치는가?" 하고는 즉시 감옥에 가두었다. 이어 군사 50만을 훈련시켜 설방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라고 했다.
이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불법을 공부하러 갔다가 인문을 찾아뵙자 인문이 이 사실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의상이 즉시 귀국해 당나라의 사정을 왕에게 보고했다. 문무왕이 이를 매우 염려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방어할 계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이 나서 "근래에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받아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옵소서"라 했다.

이때 정주에서 사람이 달려와 "수많은 당나라 군사들이 우리나라 국경까지 와서 바다 위를 돌고 있사옵니다"라고 황급히 보고했다. 왕이 명랑을 불러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명랑이 "여러 가지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써 절을 지어도 됩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비단으로 절을 꾸미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유가에 밝은 12명의 승려들과 더불어 명랑이 문두루비법을 시전했다.

◆흔적: 사천왕사와 망덕사
-사천왕사는 신라의 신들이 노닌다고 하던 낭산 신유림에 건립된 사찰로 황룡사, 감은사와 함께 대표적인 호국사찰이다. 사천왕사는 명랑법사가 문무왕의 명을 받아 당나라 침략에 대비해 지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려시대까지 문두루비법을 시전했던 단석이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초기 하륜이 경주를 거쳐 울주로 갈 때 이 절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사천왕사는 당시까지 유지됐다.
사천왕사 남쪽에는 두 기의 귀부가 머리와 비신이 없는 형태로 남아 있다. 학자들은 동쪽 귀부에는 사천왕사 사적비가 있었고, 서쪽 귀부에는 문무왕릉비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문무왕릉비의 조각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 사찰은 모두 금당 앞에 1기의 목탑을 세우는 일탑일금당식의 사찰 구조였으나 통일 이후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쌍탑을 세우는 쌍탑가람배치 형식으로 변화했다. 사천왕사도 통일 이후 시기로 보아 쌍탑가람이 최초로 나타난 사찰이다.
사천왕사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명랑법사와 양지스님이 초창기 인물로 적시되고, 경덕왕 때 도솔가와 산화가, 제망매가를 지었으며 피리를 잘 불었던 월명스님이 머물렀던 것으로 전한다.
-망덕사는 낭산의 남쪽에 사천왕사와 이웃해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사찰이다. 망덕사는 당나라 대신에게 사천왕사를 감추기 위해 건립했다. 당나라 사신 악붕구가 "망덕요산의 절"이라며 사천왕사가 아니라고 들어가지 않았던 것에 비롯해 절 이름이 망덕사가 됐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망덕사지의 당간지주는 당간 없이 지주만 남아 있지만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사천왕사지의 당간지주 형태와 다르게 중간에 간공이 없고, 상부에 당간을 고정하는 시설만 남아 있어 특이하다. 금당지 앞에 동서 목탑지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사천왕사의 형식과 똑같게 건축했다.

◆신화전설 2: 악붕구의 방문
당나라 50만 대군이 싸워보지고 못하고 바다에 수장 당하고 난 다음 당 고종은 다시 조헌을 장수로 임명해 5만의 병사로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신라는 또 다시 그 문두루비법을 시전해 전과 같이 당나라 군사들을 모두 바다에서 수장시켜버렸다.
당시 한림랑 박문준이 인문과 함께 당나라 감옥에 갇혀있었는데 고종이 문준을 불러 말하기를 "두 번이나 큰 군사들을 일으켰건만 살아서 돌아온 자가 없는데, 너희 나라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가?"라며 다그쳐 물었다.
문준이 머리를 조아리며 "저희 신하들이 당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을 전해듣고 있을 뿐이옵니다. 우리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의 남쪽에 새로이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빌기 위해 법회를 이어오고 있다는 것뿐이옵니다"라고 했다.

당나라 사신 악붕구가 신라에 와서 "먼저 황제의 만수를 비는 천왕사에서 꼭 분향을 하고싶다"면서 천왕사를 소개하라고 했다. 신라 대신은 새로 지은 절로 악붕구를 인도했다. 그러자 악붕구는 문 앞에서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바로 망덕요산의 절이다"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신라의 관리들이 그에게 거나하게 술과 고급요리를 접대하고, 금 1천냥을 그에게 주었더니 기분 좋게 돌아갔다. 악붕구는 고종 앞에서 엎드려 "신라에서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비는 축원을 하고 있었습니다"고 보고했다.
당나라 사신 악붕구의 말로 인해 사천왕사를 대신해 지은 절의 이름을 망덕사라고 했다.
문무왕은 문준이 말을 잘하여 황제가 관대하게 용서해 줄 뜻이 있다는 말을 듣고 즉시 강수에게 지시를 내려 인문을 석방해 달라는 글을 쓰게 하고, 사인 원우를 시켜 당나라에 그 글을 올리게 했다. 황제가 그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문을 용서하여 위로하고 신라로 돌아가라고 허락했다.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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