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은 영어, 재판은 아랍어? 두바이 비즈니스의 역설 [파일럿 Johan의 아라비안나이트]
“계약금 500만 디르함(약 18억원)을 날릴 뻔했습니다. 현지 파트너가 갑자기 연락을 끊고 사무실을 비웠어요. 경찰에 신고하려니 민사 문제라고 하고, 현지 변호사를 찾아가니 수임료만 10만 디르함을 달라고 하더군요.”
작년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사업을 추진했던 한 외국계 스타트업의 실제 경험담이다. 다행히 계약서상 명백한 사기 정황을 입증해 형사 고소로 압박했고, 결국 계약금의 80%를 회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6개월이라는 시간과 수천만원의 법률비용이 들었다.
두바이는 ‘계약의 도시’다. 악수 한 번으로 수십억 거래가 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계약서와 법률에 의해 움직인다. 문제는 이 법률 시스템이 한국과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우선, 일반적인 민사 및 상사 분쟁은 UAE 온쇼어 법원에서 다룬다. 가족법이나 상속 문제는 같은 법원 내에서 샤리아법(이슬람법)을 적용한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언어다. 모든 재판이 아랍어로 진행된다. 계약서도, 증거도, 변론도 모두 아랍어로 번역해야 한다.
지난해 온쇼어 법원에서 소송을 진행한 한 무역업체 대표는 “영어 계약서 100페이지를 아랍어로 번역하는데만 3만 디르함이 들었다”며 “그것도 법원 공인 번역사를 통해서 해야 해서 시간도 2주나 걸렸다”고 털어놓았다.
더 답답한 건 판결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특히 외국인 대 현지인 소송에서는 은연중에 불리한 경우가 있다는 게 현지 한국 기업들의 공통된 견해다.
다행히 최근에는 조금씩 변화의 조짐도 보인다. 지난해 UAE 대법원은 현지 상업대리인을 상대로 한 HD현대건설기계의 계약 해지 소송에서 한국 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하급심에서 모두 패소한 외국 기업이 대법원에서 승소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중동도 이제는 해외 기업의 권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현지에서 당하는 불이익을 참을 필요가 없어졌죠.” 이 사건을 담당했던 김현종 법무법인 지음 대표변호사의 말이다.

마지막으로 영어로 진행되는 국제법원인 DIFC Courts(두바이)와 ADGM Courts(아부다비)가 있다. 영어로 재판이 진행되고, 영미법을 직접 적용한다. 판사들도 영국, 싱가포르, 호주 등에서 초빙한 국제 판사들이다.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큰 점수를 받고 있다.
하지만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최소한 한쪽이 DIFC나 ADGM에 등록된 기업이거나, 계약서에 관할 조항이 있어야 한다. 최근에는 양 당사자가 합의하면 이용할 수 있는 ‘Opt-in’ 제도도 생겼다.

24시간 이내로는 증거를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상대방이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즉시 모든 것을 백업하세요. 이메일, 왓츠앱, 계약서, 영수증, 뭐든지요.”
실제로 한 무역업체는 파트너가 연락을 끊자마자 모든 왓츠앱 대화를 PDF로 저장하고 공증받았다. 나중에 재판에서 이것이 결정적 증거가 되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왓츠앱 메시지도 법적 증거로 인정받는다. 단, 아랍어 번역과 원본성 확보가 필수다. 전체 대화를 그대로 보관해야 하며, 일부만 편집하면 증거 능력을 잃는다.
48시간 이내로는 변호사를 만나는것이 좋다. 현지 법무법인 대표는 “처음부터 비싼 로펌에 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상담은 받아보는걸 추천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법조인들이 법무부에 등록되어 있듯이, UAE 변호사 역시 정식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방 법무부나 해당 에미리트 법원에 등록돼 있어야 한다. 한국인 변호사도 있지만, 현지 변호사와 협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소득층은 두바이 법률원(Dubai Legal Affairs Department)에서 무료 법률 지원을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해당사항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72시간 이내로는 법적 통지를 보내야 한다. Legal Notice라고 불리는 내용증명을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게 있어야 나중에 법원에서 “화해를 시도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 법조인들의 견해다. “내용증명 한 통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아요. 상대방도 법정까지 가고 싶지 않거든요.”

협상(Negotiation)은 가장 싸고 빠른 방법이다.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다. 변호사가 대신 협상할 수도 있다. 비용이 거의 안 들지만, 성공률은 40%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래도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
조정(Mediation)은 중립적인 제3자가 양쪽을 도와 합의점을 찾는 방식이다. 두바이 법원 화해센터(CASD), DIAC 조정,DIFC Courts 조정 서비스 등이 있다. 예컨대 DIAC는 등록비 2,000달러에 사건 규모별 수수료가 추가된다.
한 법무법인 관계자는 “조정의 가장 큰 장점은 비밀이 보장된다는 것”이라면서 “소송은 공개되지만 조정 내용은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공률도 70%로 꽤 높은 편이다. 양쪽이 진심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좋은 선택이다.
중재(Arbitration)는 민간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 아부다비 ADGM 및 두바이 DIAC 중재센터가 대표적이다. 중재의 장점은 속도다. 일반 법원보다 훨씬 빠르게 결론이 난다. 단점은 비용이다. 중재인 수임료가 만만치 않다. 일반적으로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 들 수 있다.

먼저 소장을 작성한다. 당사자 정보, 분쟁 내용, 법적 근거, 요구사항을 명확히 써야 한다. 그리고 증거 목록을 첨부한다. 소송 비용은 청구 금액에 따라 다르다. 두바이 민사법원은 청구 금액의 구간별로 다르지만 대략 6% 수준이며, 최대 4만 디르함이다. 이 돈은 소송을 시작할 때 먼저 내야 한다. 나중에 이기면 상대방에게 청구할 수 있다.
소장이 상대방에게 전달되면, 상대방은 답변서를 제출한다. 온쇼어 법원은 통상 10영업일, DIFC 법원은 14~28일 정도다. “많은 한국 기업이 실수하는 게 송달입니다.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재판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어요.”
그 다음은 증거 제출과 변론 그리고 판결이다. 판결이 나와도 끝이 아니다. 상대방이 자발적으로 이행하지 않으면 강제 집행을 해야 한다. 법원 집행부(Enforcement Department)에 신청서를 낸다. 판결문 원본, 집행 명령 신청서, 상대방 재산 정보가 필요하다.
집행 방법은 다양하다. 부동산이나 차를 압류해서 경매에 넘길 수 있다. 은행 계좌를 동결하고 잔액을 가져올 수도 있다. 월급의 일부를 압류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장 강력한 건 출국 금지다. 일정 금액 이상(보통 1만 디르함 이상)의 경우 출국 금지가 걸리면 대부분 어떻게든 돈을 마련한다고 한다. 두바이에 계속 갇혀 있을 순 없기 때문이다.

중동에서 사업을 한다면 특히 모든 약속은 문서로 남기고, 중요한 서류는 공증받아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72시간 안에 대응하고, 현지 법률 전문가를 미리 알아두는 것도 중요하다.
현지에서 10년째 사업 중인 한국 기업인은 이렇게 말했다. “두바이는 계약의 도시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평판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분쟁이 생기더라도 전문적이고 품격 있게 대응한다면, 오히려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한 번 꼬인 관계도 잘 풀면 더 돈독해질 수 있어요.”
사실 법정 싸움은 이겨도 지는 게임이다. 시간, 돈, 에너지를 모두 소모하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조정이나 중재로 해결하고, 정말 불가피할 때만 소송을 하는게 좋다. 남의 나라에서 격렬하게 싸워봤자 본인 심신만 피폐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부터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 도움말 및 참고자료 = UAE 법무부(Ministry of Justice) 통계, DIFC 법원 판례집, 두바이 법원 조정센터 자료, 두바이 법률원(Dubai Legal Affairs Department), 두바이 조정센터(Dubai Mediation Centre), 콘텐츠진흥원 UAE 지부 및 코트라 두바이 무역관 법률 자문 자료 종합
[원요환 UAE항공사 파일럿 (前매일경제 기자)]
john.won320@gmail.com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2주사이 31명 숨졌다”...90% 치사율 보이는 ‘이 병’ 다시 유행한다는데 - 매일경제
- 오늘의 운세 2025년 9월 22일 月(음력 8월 1일) - 매일경제
- 이재명 대통령 “미국 요구대로 하면 1997년 금융위기 반복” - 매일경제
- “2030 돈 제대로 벌었겠네”...1년 수익률 ‘450%’ 코인, 투자자 살펴보니 - 매일경제
- “한국차 수준에 미국이 또 놀랐다”…상복 터진 현대차·기아, 디자인도 미쳤다 [왜몰랐을카] -
- 조지아 구금사태에 혼쭐난 현대차, 미국인 공개채용 팔 걷었다 - 매일경제
- [단독] 노량진 재개발 입주권 샀는데 ‘멘붕’…6억 넘는 이주비 대출승계 막혔다 - 매일경제
- 김정은 “통일할 생각 전혀 없다…하나 될 수 없는 두 개 국가” - 매일경제
- 한인 유학생 패닉 "美 취업길 막혔다" 美 빅테크도 혼돈 "직원들 출국 말라" - 매일경제
- 김하성, 이틀 만에 홈런포 폭발! 애틀란타도 8연승 질주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