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4000만원’ 비자 장벽... 실리콘밸리에 ‘대못’ 박은 트럼프
백악관 “미국인 노동자 보호 위한 조치”
산업계, 매년 20조원 추가 부담 예상
“혁신 저해·일자리 해외 이전 부추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각) 전문직 취업비자(H-1B) 수수료를 10만 달러(약 1억 4000만원)로 100배 인상하는 조치를 발표하자, 미국 산업계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인 일자리 보호를 내세웠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선 ‘미국 경쟁력을 해치는 자해 행위’라고 우려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등 일부 빅테크(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거대 IT기업)들은 인재 유출과 해외 이전을 검토하기로 했다.

21일 포브스와 CNBC 등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에 서명한 19일 오후, 아마존, 구글, JP모건 등 미국 기업들은 즉각 해외 체류 중인 H-1B 비자 소지 직원들에게 ‘새 규정이 발효되기 전 즉시 귀국하라’는 긴급 공지를 보냈다. 경제 전문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발(發) 인도행 에미레이트 항공편에서는 새 행정명령이 떨어지자 이륙 직전 H-1B 비자 소지자 40여 명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일로 해당 항공편은 이륙이 3시간 이상 지연됐다.
그럼에도 불확실성이 가시지 않자 기업들은 최대한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대응에 나섰다. 주요 기업들은 미국에 머무는 H-1B 비자 소지 직원들에게 “추가 공지가 있을 때까지 당분간 모든 해외여행 계획을 취소하거나 보류하라”고 권고했다. 괜히 나갔다가 다시 못 들어오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조치다.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도 이번 명령을 둘러싼 엇박자가 나오면서 초기 혼란을 키웠다. 이날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수수료가 매년 부과되며 비자 갱신 시에도 적용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백악관은 다음 날 “신규 신청자에게만 부과하는 일회성 수수료”라고 정정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장기적으로 미국 혁신 생태계에 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특히 인공지능(AI) 같은 첨단 기술 분야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테크기업 연합체 ‘진보 상공회의소’ 애덤 코바체비치 대표는 뉴욕타임스(NYT)에 “AI 분야 최고 인재는 한정돼 있고, 일부는 외국 출신”이라며 “이번 조치는 중국과 AI 전쟁에서 한 손이 등 뒤에 묶인 채 싸우는 것과 같다”고 했다.
특히 소규모 스타트업 업계는 존폐 기로에 섰다. 거대 기술 기업들은 10만 달러 수수료를 감당할 여력이 있다. 반면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신생 기업에 이 비용은 생존을 논해야 할 만큼 치명적이다. 벤처캐피털 멘로 벤처스 파트너 디디 다스는 “초기 스타트업은 개발자에게 15만~20만 달러 연봉을 주는데, 여기에 10만 달러 수수료를 더하면 채용이 훨씬 어려워진다”고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말했다. 스타트업 육성기업 와이콤비네이터 게리 탠 대표는 소셜미디어 엑스(X)에 “이번 결정은 스타트업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라며 “캐나다 밴쿠버와 토론토를 포함한 모든 해외 기술 허브에 큰 선물이 될 것”이라고 썼다.
일부 기업들은 벌써 미국 대신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리고 있다. MS 한 임원은 “이민법이 더 우호적인 캐나다로 더 많은 직원을 옮길 수 있다”며 “미국은 10만 달러 수수료도 못 받고, 이민자 한 명당 연간 10만 달러에 달하는 세수입을 잃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글 한 관리자 역시 멕시코나 인도 같은 해외 지사 채용을 늘릴 것으로 예상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과감했다고 옹호하는 시각도 있다. 보수 성향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 로라 리스 국장은 NYT에 “10만 달러 수수료는 H-1B 프로그램 개혁의 ‘좋은 시작’”이라고 평가했다. 백악관 역시 공식 성명에서 “고용주들이 저임금 외국인력으로 미국인을 대체하는 H-1B 비자 악용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백악관은 익명의 특정 미국 기업을 예로 들며 ‘이 기업은 2025 회계연도에 H-1B 비자 5189건을 승인받는 동안, 미국인 직원 약 1만 6000명을 해고했다’고 밝혔다. 주요 매체들은 백악관이 지목한 이 기업이 정황상 지난해 H-1B 비자 5198건을 발급받은 MS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미국 기업들이 실제 부담할 비용은 천문학적 수준으로 추산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1일 미 이민국(USCIS) 통계를 인용해 작년 신규 H-1B 비자 발급 건수가 14만 1000건에 달했다고 전했다. FT는 내년에도 발급 건수가 비슷할 경우, 미국 기업들이 부담할 총비용은 연간 140억 달러(약 2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H-1B 비자는 IT 업계가 주로 활용해왔다. USCIS 통계에 따르면 2023년 H-1B 비자 취득자 3분의 2가 IT 업계 종사자였다.
기업들은 이번 조치가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이민변호사협회는 이번 주말까지 임시 금지 명령을 요청하는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대형 로펌 허버트 스미스 프리힐즈 소속 한 변호사는 FT에 “행정부는 비용 회수를 위해 수수료를 부과할 권한이 있지만, 10만 달러는 규제 권한을 완전히 벗어난 조치”라며 “법원이 개입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덧붙였다 .
H-1B 비자 수혜자 70% 이상을 차지하는 인도 정부는 “인도주의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로이터는 전문가를 인용해 “단기적으로 정부가 큰돈을 거둬들일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은 역동성을 근시안적인 보호무역주의와 맞바꾸며 혁신 우위를 잃을 위험이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H-1B 수수료 인상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100만 달러(약 14억원)를 기부하면 영주권을 신속하게 발급해주는 ‘골드카드’ 제도를 같이 도입했다. 이를 두고 노동계와 이민 단체는 ‘부유층 전용 입국 통로’라며 비판했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100만 달러를 기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미국에 예외적인 가치를 증명한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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