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오스카 경쟁작 ‘국보’, 천만영화라더니 이유있었네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54번째 레터는 며칠 전 일본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국보’입니다. 재일 한국인 3세인 이상일 감독의 작품인데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처음으로 공개됐죠. 바로 달려갔습니다. 일본이 ‘국보’를 내년 제98회 오스카 시상식 국제장편영화 부문에 일본 후보작으로 제출했거든요. 한국 후보작은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입니다. ‘국보’는 칸 영화제 감독주간 초청작이고, ‘어쩔수가없다’는 베니스 경쟁 부문 초청작. 만만치 않네요.
‘국보’ 상영시간은 무려 175분, 3시간입니다. 시사회 보기 전 제 생각은? “3시간을 어떻게 버티지.” 시사회 끝나고 제 생각은? “3시간이 언제 지났지?” 네, 천만영화가 된 이유가 있더군요. 자세한 리뷰는 하반기 국내 개봉할 때 보내드리기로 하고, 이번 레터에선 ‘국보’가 어떤 영화인지 핵심 내용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화 ‘국보’의 주인공은 가부키 배우입니다. 최고의 배우가 되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버린 남자죠. 가부키란 말을 들으시면 “아, 난 가부키 모르는데, 가부키 관심없는데” 하실 수 있는데, 가부키 모르셔도 됩니다. 가부키 공연을 여러 번 보여주긴 해요. 하지만 가부키가 아니라 인간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재능을 타고난 남자와 핏줄을 타고난 남자의 경쟁. 예술의 신은 누구를 더 편애할까요.
주인공이 배우, 그 중에서도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가부키 배우라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가부키가 세습 체제이다보니 재능이 아무리 특출나도 가부키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 가진 독보적 지위 앞에서 별무소용이 될 수 있습니다. ‘국보’의 주인공이 그랬듯. (주인공이 가부키 가문 아들에게 “야, 이 금수저 도련님아!”라고 외치는 장면도 있어요.) 또 하나,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공연 배우이기 때문에 매번 무대에서 승부를 봐야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카메라 마사지 없고 편집으로 가려지거나 보완될 수도 없습니다. 매 공연이 벼랑인 거죠.
‘국보’ 주인공 키쿠오(요시자와 료)는 야쿠자 두목의 아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끼가 넘쳐요. 집에서 여는 신년회에서 간이 무대에 서기도 합니다. 아버지 표정을 보면 별로 마땅치 않아 하는 것 같은데, 이건 최종 확인이 불가능한 것이, 도입부에서 아버지가 반대편 야쿠자 세력에게 살해되거든요. 아들 눈 앞에서. 흰 눈이 훨훨 날리는 하이얀 겨울의 정원에서.
키쿠오네 신년회에 갔다가 키쿠오의 재능을 바로 알아본 사람이 가부키 배우인 한지로(와타나베 켄)입니다. 한지로는 키쿠오를 제자로 거두게 되는데, 한지로에겐 아들 슌스케가 있어요. 얘도 당연히 가부키 배우를 하려 하고요. 자, 이 구도 보시면 짐작하시겠지만, 키쿠오는 타고난 재능으로 슌스케를 앞섭니다. 그냥 너무 잘해요. 하지만 그래봤자 뭐하나요. 슌스케는 가부키 집안의 금수저 도련님. 결국 슌스케가 다 차지하게 설계가 돼있는데요.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무대에 서게 되는데 한지로가 와서 둘을 각각 격려합니다. 슌스케에게 말하죠. “넌 잘할 거야. 잘하게 돼있어. 왜냐면 너는 내 아들이니까, 우리 가문의 피가 흐르니까. 그 피가 너를 지켜줄거야.” 눈에서 격려의 빛을 마구 쏘아줍니다. 이어서 키쿠오에게 말합니다. “음, 너 열심히 연습했잖아. 하루도 쉬지 않았지. 몸이 동작을 기억하고 있을거다.” 아. 피 없으니 몸으로 때워야 하나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키쿠오가 슌스케를 압도적으로 능가한다는 것을. 한지로도 알고, 슌스케도 알고, 아들 슌스케만 감싸는 한지로 부인도 알고, 최대 후원자도 알고, 그냥 보면 누구나 알아요. 하지만 그놈의 피. 아무리 갖고 싶어도, 애쓰고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피. 그 피 앞에서 키쿠오는 좌절합니다. 나중에 키쿠오는 슌스케에게 이런 말도 해요. “네 피를 마시고 싶다”고요. 핏줄 이야기는 영화를 만든 이상일 감독의 일부가 투영된 스토리이기도 하겠지요.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에 사는 그에게 남다른 바가 있을테니까요.

피를 갖고 태어난 가부키의 아들 슌스케, 하지만 그 피가 그렇게 축복이기만 할까요. 영화는 슌스케를 제치고 한지로의 선택을 받은, 혹은 받았다고 생각했던 키쿠오의 짧은 성공과 예견된 좌절, 극복과 성공의 세월을 시간 순으로 보여줍니다. 매우 대중적이고 친절해요. 우선 형식에서부터 그렇습니다. ‘내가 뭔가 보여주겠어’라는 감독이었다면 선택했을 전형적 플래시백이나 복잡한 형식적 장치가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형식미는 가부키 자체에서 나와요. 배우와 객석 사이 사전에 약속된 양식에 따라 완벽하게 창조된 무대 위, 저 너머 세계를 지켜보는 긴장과 흥분, 기대와 떨림이 있거든요. (그 중 한 공연은 ‘와, 얼마나 훈련하면 저게 되지?’라고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보시다보면 이 얘기 익숙하다, 어디선가 봤던 설정이다, 하실 수도 있어요. 그 익숙함이 끌어주는 편안한 길을 따라 3시간이 휘리릭.
영화에서 키쿠오와 슌스케의 가부키 공연을 간접적으로 관람하면서 배우의 길, 예술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하나 싶은 대목도 나와요. 배우가 뭐기에. 예술이 뭐기에. 초반에 인간 국보인 만키쿠로 나오는 할아버지 배우가 있는데, 2023년 국내에서도 개봉한 영화 ‘이름없는 춤’의 다나카 민입니다. 실제로 대단히 존경받는 현대무용가죠. 이 할아버지 춤 보면 딴 세상 사람 같아요. (아, 그때 인터뷰할 기회를 놓친 게 이제와서 새삼 안타깝네요. 반나절치기로라도 대구에 갔어야 했는데!) 키쿠오 어린 시절을 연기한 배우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주연인 쿠로카와 소야입니다. ‘괴물’ 봤을 때도 잘한다 싶었는데 ‘국보’에서도 잘 했어요. 제가 키운 배우마냥 대견하더군요.
어린 시절 키쿠오와 슌스케는 만키쿠의 공연을 넋을 잃고 보다가 감탄합니다. “초현실적이다. 저건 괴물이야.” “그래, 아름다운 괴물이지.” ‘국보’는 그렇게 ‘아름다운 괴물’이 되고 싶어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처절한 눈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국보’에는 수수께끼도 들어있어요. 키쿠오가 평생 사로잡힌 이미지가 있거든요. 키쿠오는 그게 뭔지 내내 궁금해 합니다. 해답은 영화에 들어있으니 여러분도 보시면서 각자 풀어보시길. 저는 그 해답이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말한 ‘전기’하고도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싶어요. ‘국보’는 국내에서 하반기 개봉인데, 키쿠오의 해답과 빌리 엘리어트의 전기가 왜 같다고 생각했는지는 그때 가서 ‘그 영화 어때’ 레터에서 자세하게 말씀드릴게요. 그럼,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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