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본심? ‘한국은 보은하라, 나라가 망하더라도’

이종태 기자 2025. 9. 22.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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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투자하라더니, 그 투자를 실행하던 노동자들을 쇠사슬로 감았다. 미국 측의 조지아주 현대차·LG엔솔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 급습은 단순한 이민 단속 사건으로 보기 어렵다.
9월4일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조지아주의 현대차·LG엔솔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을 덮쳤다. 직원들이 버스에 손을 짚고 보안 검색을 당하고 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 동영상 갈무리

트럼프 ‘마가(MAGA·다시 미국을 위대하게)’의 대중심리적 기초는 원한(怨恨)이다. ‘위대했던’ 미국이 다른 나라,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발전한 한국, 일본, 서유럽 같은 국가 때문에 주저앉고 말았다는 ‘신화’에 기반한다. 미국은 1950년대까지 글로벌 제조업 생산의 60% 정도를 점유했다. 덕분에 중산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일자리와 대량소비를 누렸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모델이었다. 이 비중은 점차 줄어 2020년대 이후엔 10%대 중반까지 꺾인다. 일각에서는 주식시장의 발전 덕분에 미국이 번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 금융시스템은 제조업으로 자원을 배분하지 않았다. 금융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으로 진입하지 못한 미국 시민들의 삶은 극도로 불안정하다. ‘마가 세력’이 등장해 ‘미국의 희생으로 잘나간’ 해외 국가들에 뜨거운 분노를 내뿜게 될 만큼.

‘다시 미국이 위대’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가 세력은 ‘미국의 희생으로 잘나간’ 나라들로부터 빼앗긴 것을 되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한’의 궁극적 지향점은 ‘내 지위의 회복’이 아니라 ‘적’의 몰락이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하지 않으면, 9월4일 오전(현지 시각)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LG엔솔)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 대한 미국 이민 당국의 급습과 대규모 구금 사태 같은 사건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한국, 일본 등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터무니없는 요구들도 그렇다.

‘급습 현장’에선 마치 군경의 대규모 범죄 조직 소탕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은 장갑차량과 함께 현장으로 진입했다. 요원들은 작업 중단을 명령한 뒤 노동자들을 공장 외부로 모아 줄 세웠다. 노동자들은 버스 측면에 손을 대고 엉거주춤 선 상태에서 보안 검색을 받은 뒤 손목과 허리, 심지어 발목에 쇠사슬 족쇄가 채워진 채 이송 버스에 올랐다. ICE는 이런 장면들을 촬영해 자랑스럽게 공개했다.

“단속 가운데 역사상 최대 규모”

불법체류 및 불법노동 혐의로 체포된 노동자들은 250㎞ 정도 떨어진 조지아주 최남단의 포크스턴 구치소로 끌려가 구금되었다. 미국 내에서도 불결한 위생 환경과 인권침해로 인권 단체들의 비판을 받는 장소다. 모두 475명이 갇혔다. 그중 300명 이상이 한국 국적 노동자다. LG엔솔 직원 47명과 협력 업체 소속 250여 명 등으로 알려졌다. ICE의 상부 기관인 국토안보부(Homeland Security)는 기자회견에서 “수개월 동안 이어진 수사의 성과”이며 “단일 사업장을 대상으로 이뤄진 단속 가운데 역사상 최대 규모”라며 성과를 과시했다.

미국 조지아주 엘러벨에 위치한 ‘현대자동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의 전경. ⓒ현대차그룹 제공

현대차·LG엔솔 합작 전기차 배터리 공장은 바이든 행정부 시절인 2022년 하반기에 착공되었다. 같은 해 5월, 한국을 방문한 바이든 당시 대통령이 투자 유치에 직접 나섰다. 그는 미국 내에 첨단 친환경 제조업을 육성해 관련 일자리를 창출하고 싶어 했다. 그해 8월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제정해 미국 친환경 산업(전기차·배터리·재생에너지)에 대한 보조금 및 세액공제를 법제화했다. 한국 대기업들은 이런 우호적 환경을 믿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 현지 투자에 나섰다. 그 상징적 사업장이 바로 현대차·LG엔솔 엘러벨 공장이다. 이 공장은 올해 말부터 가동을 시작하면 일자리 8500개를 지역사회에 제공할 터였다. 이 업체 부근엔 현대차의 전기차 조립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두 생산기지(‘현대차 미국 메타플랜트’로 불린다)를 합친 투자 규모는 76억 달러(약 10조원)에 달한다. 조지아 주지사인 브라이언 켐프(공화당)는 이 메타플랜트를 조지아주 역사상 최대 경제개발 프로젝트로 홍보해왔다.

트럼프 행정부 역시 ‘외국자본 유치를 통한 제조업 육성’이라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방법은 이전과 180도 다르다. 미국의 소비시장과 정치·군사적 파워를 지렛대로 해외 국가들에 천문학적 대미 투자를 압박한다. 상대국 경제가 처할 불이익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흡사 ‘너 때문에 우리 경제가 몰락했으니 너도 망할 각오를 해!’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이런 의지를 내비칠 때 마가 세력으로부터 정치적 인기를 짜낼 수 있다. 트럼프는 한국에 3500억 달러(약 486조원) 규모의 공공성 자금과 함께 민간 대기업 차원의 1500억 달러(약 208조원)까지 추가로 미국에 투자하라고 강요했다. 더욱이 미국 정부의 (반)강제적 유치 및 압박에 순응한 현지 투자 사업체를 겨냥해 ‘급습’을 실행하기까지 했다. 그다음 날(9월5일), 트럼프는 기자들의 질의응답에서 끌려간 노동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불법적 경로로 들어왔다. ICE는 자신의 직무를 이행했을 뿐이다.”

외국인이 미국에서 ‘노동(일하고 그 대가를 받는 행위)’하려면, 그에 적합한 비자를 받아야 한다. 그 측면에서 현대차·LG엔솔과 구금 노동자들이 미국 법을 어긴 것은 사실이다. 노동자들의 상당수는 현대차·LG엔솔의 협력 업체 소속이다. 한국에서도 이번 사태의 책임을 한국 대기업들에 돌리는 의견이 나온다. 일리 있는 견해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는 따로 있다. 두 회사가 정직원들만 미국 현지에 보내려고 했어도 모두가 안정적 비자를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우선, 현대차·LG엔솔 합작 배터리 공장은 완공(올해 말 예정)된 상태가 아니라 건설 중이었다. 미국의 건설업은 악명이 높다. 한번 공사가 시작되면 끝나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돌 정도다. 〈이코노미스트〉(4월28일)에 따르면, 미국 현지의 건설업 생산성은 1960년대 대비 40%에 그친다. 제조업 쇠퇴로 공장 자체를 짓지 않았다. “미국 전역의 5만여 제조 시설 가운데 절반 이상은 30년이 넘었고, 평균적으로는 50년 전에 지어졌”으며, “지난 4년 사이 공장 건설 지출이 두 배로 늘었”지만 이는 바이든 행정부의 제조업 유치 노력 덕분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평가한다. 그나마 일부 프로젝트는 건설 단계부터 한계에 부딪혀 계획을 철회했다. 미국 현지엔 건설 관련 노동력의 공급 자체가 부족하다.

미국 당국이 바라는 것처럼 현지 고용을 창출하려면, 건물을 짓고 장비를 설치하며 기계를 세팅하는 작업을 빨리 완수해야 한다. 한국의 숙련공들이 필요했다. 그들의 직무는 단기적·순환적이며 수년 동안의 장기 체류가 필요하지 않다. 즉, 파견 노동자들은 수개월 동안 일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올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에 적합한 비자를 미국 당국으로부터 얻어낼 수 없었다. 외국인이 미국 현지에서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일하려면 전문직 취업비자(H-1B)가 필요하다. 그러나 H-1B는 다른 모든 나라에 대해 연간 8만5000개만 발급하게 규정되어 있다. 연초에만 신청서를 접수한다. 경쟁률도 대단히 높다. 건설이나 설비 가동 준비에 필요한 숙련 노동자들을 미국으로 대량 파견하기가 애초 어렵게 되어 있다. ‘주재원 비자(L-1)’나 ‘투자자 비자(E-2)’로도 안정적 현지 체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L-1과 E-2는 투자 업체의 임원 등 관리자와 고급 엔지니어를 대상으로 한다. 까다로운 심사 절차를 거쳐야 할 뿐 아니라 발급 비자의 수도 매우 제한적이다.

한국 대기업들은 단기 체류용 비자 제도를 이용하는 편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용도에 쓰이는 대표적 비자는 B-1(사업 목적 방문자 비자)이다. 사업용 미팅, 계약, 단기 교육, 공장 시찰 등을 목적으로 미국을 방문할 때 발급된다. 기본적으로 6개월 체류를 허용받으며 연장 신청을 하면 6개월을 더 늘릴 수 있다. 그러나 수개월에 걸친 심사 기간을 거쳐야 하는 데다 미국 입국을 거부당하는 확률도 상당히 높다. 또 하나의 단기 체류용 수단이 바로 이스타(ESTA·전자여행허가제)다. 비자 면제 프로그램(Visa Waiver Program)으로 불린다. 수수료만 내면 온라인으로 신청하고 수 시간 내에 승인받을 수 있다. 승인율이 높고 90일 동안 미국 체류가 가능하다. 끌려간 노동자 대다수는 B-1과 이스타로 미국에 들어갔다. 회사 측이나 노동자들은 관행적으로 허용된다고 믿었다. 그 틈새로 ICE가 치고 들어왔다.

미국의 국시가 된 ‘외국인 추방’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현대차·LG엔솔 합작 배터리 공장의 건설은 9월10일 현재 완전히 중단된 상태다. 가동 시점도 늦춰질 것이다. 한국 대기업들이 미국 현지에 새로 짓거나 증설 중인 대규모 사업장이 20곳 넘는다. 150조원(1000억 달러) 정도가 투자 완료되었거나 진행 중이다. 분야도 배터리뿐 아니라 조선·반도체·철강·태양광 등 다양하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투자를 실행할 노동자들을 미국으로 파견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B-1이나 이스타로 미국 출장 중인 직원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약속된 민간기업의 1500억 달러 규모 투자(이미 진행 중인 투자를 감안하면 500억~1000억 달러)도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다. 미국의 국시(國是)가 ‘외국인 추방’인 상황에서 비자 제도를 완화해 지지층의 반발을 부르고 싶지 않을 터다. 즉, ‘공기 단축으로 현지 고용 창출을 서두르라’고 재촉하는 동시에 파견 노동자들의 합법적 체류 신분은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트럼프 행정부는 발뺌할 수 있다.

전 세계가 이번 사태에 경악했다. 해외 국가들에 대미 투자를 강요하며 다른 한편으론 오히려 이를 방해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진의를 짐작하기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트럼프는 9월8일 만난 기자들에게 ICE 급습의 정당성을 강변하면서 ‘비자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 “해외 인력을 일정 기간 머물도록 하면서 미국 노동자들에게 (배터리·컴퓨터·선박 등) 복잡한 작업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술만 빼먹으려 한다’는 평가도 있지만, 개도국 시대의 한국과 지금의 중국도 해외투자를 받을 때 암묵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요구해온 사안이다. 미국의 낙후한 제조업 상태와 노동력을 감안하면 대놓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신호는 혼란스럽다. 톰 호먼 국경 안보 총괄 책임자(일명 ‘국경 차르’)는 9월7일 CNN 인터뷰에서 현대차·LG엔솔 공장 급습 같은 대규모 단속을 “앞으로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크리스티 놈 국토안보장관은 구금된 노동자들에 대해 “법에 따라 추방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금 노동자들은 사태 일주일 만인 9월11일 새벽(현지 시각) 일반 버스 8대에 나눠 타고 대한항공 전세기가 대기하고 있는 애틀랜타 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9월12일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워싱턴으로 급히 날아간 조현 외교부 장관은 9월10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을 만났다. 루비오 장관은 “한국의 대미 투자를 환영한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한·미 간 무역 합의 세부 사항이 논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이 9월10일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숙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행정부의 의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가능하다. 정치·이념적 입지에 따른 혼선으로 풀이할 수 있다. 트럼프의 핵심 지지자인 마가 세력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투자 유치보다 외국인을 혼내주는 것이다. ICE는 왜 급습 장면을 공들여 촬영해 공개했을까?

한국과 미국 간 무역 협상이 진행 중인 가운데(〈시사IN〉 제938호 ‘남의 돈으로 경제 재건? 한·미 협상은 진행 중’ 기사 참조), 트럼프가 ICE 단속을 압박 수단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상대방을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으로 몰아붙여 철저히 무력화하는 것이 트럼프 정권의 특기다. 무역 협상이 (너도 좋고 나도 좋다는 의미의) ‘호혜’적이어야 한다는 원칙도 던져버린 지 오래다.

마가 세력에게 인기 높은 폭스 뉴스의 인기 방송인 로라 잉그러햄은 9월9일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한국 정부가 분노를 표시해 충격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후버 연구소의 빅터 데이비스 핸슨 선임 연구원은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지난 75년 동안 미국은 3만6000명(한국전쟁 전사 미군)의 희생을 치르며 한국의 자유를 만들어주고 지켜왔다. 한국이 이번에는 좀 더 자제(restrain)하는 모습을 보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 더 큰 문제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행태는 단순한 이민 단속 사건이 아니다. 한국·일본·EU에 대한 무역·투자 압박과 같은 맥락 위에서 읽어야 한다. 투자하라고 강요하면서 그 투자 집행에 필요한 인력을 쇠사슬로 구속해 전시하는 것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힘을 앞세운 무력화 전략”이다.

마가 세력의 심리를 자극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트럼프식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한국은 미국 덕분에 번영했다. 이제 은혜를 갚아라. 너희 나라가 망하더라도.’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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