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업체에 건넨 내 계좌, 돈세탁 통장으로 사용됐다

40대 이모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자금 세탁을 도왔다는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1억원이 넘는 범죄 수익금을 세탁하는 데 이씨 통장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작년 중순 권고 사직을 받아 회사를 그만둔 이씨는 카드 값, 월세가 밀리자 은행을 찾았지만 ‘소득이 없으면 대출이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며칠 뒤 발견한 소셜미디어 광고 글은 ‘무직자도 대출 간단 해결’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댓글로 연락처를 남기자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상담원은 “대출 승인을 받을 수 있는데, 계좌 거래 실적만 조금 쌓으면 된다”고 했다. “계좌에 돈을 입금해 드릴 테니 이 돈으로 상품권과 가상 화폐를 사서 우리한테 다시 전달해 주세요.” 이 상담원은 사실 보이스피싱 조직원이었다. 이씨는 “대출이 급한 상황에서 실적까지 높여준다고 하니 혹했다”며 “범죄인 줄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불법 자금 세탁 규모도 함께 급증하고 있다. 21일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보이스피싱 조직에 대포 통장(차명 계좌)을 제공해 검거된 인원은 3833명으로 작년(2072명)보다 85% 늘어났다. 금융감독원이 이양수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사기 이용 계좌로 신고돼 전국 은행에서 지급 정지한 계좌 수는 작년 4만215개, 총피해액은 2516억원이었다. 2020년(2만8688개·1869억원)과 비교하면 각각 40.2%, 34.6% 증가했다. 이 의원은 “지급 정지되지 않고 결국 해외로 빠져나간 금액은 훨씬 많을 것”이라고 했다.

자금 세탁은 보이스피싱 범죄의 마지막 단계다. 중국·동남아 등 해외에 거점을 둔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범죄 수익을 대포 통장으로 세탁한 뒤 해외로 유출하고 있다. 지난 2011년 정부는 피해자가 경찰 등에 신고하면 사기 이용 계좌를 즉각 동결시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지급 정지’ 제도를 도입했다.
그런데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 수법이 갈수록 고도화돼 사기라는 걸 깨닫고 경찰에 신고하는 시점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다. 지급 정지 조치가 이뤄지기도 전 범죄 조직들이 느긋하게 여러 차명 계좌를 돌려가며 이체시키는 방식으로 돈을 세탁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범죄 조직들이 경제적 벼랑 끝에 몰린 이들에게 접근해 저신용자 대출이나 고액 아르바이트를 미끼로 대포 통장을 대거 확보하고 있다”고 했다.
대포 통장 이외의 자금 세탁 수법도 점점 더 교묘해지고 있다. 주부 서모(39)씨는 얼마 전 온라인 중고 거래 플랫폼인 당근에서 중고 마사지기를 판매하려다가 계좌 지급 정지 조치를 당했다. 마사지기를 사겠다던 사람이 서씨 계좌로 수백만 원을 보낸 뒤 전화를 걸어 “실수로 돈을 잘못 보냈는데, 내 아들 계좌로 돈을 환불해 줄 수 있느냐”고 했다. 의심 없이 돈을 돌려줬는데, 사실은 보이스피싱 범죄 수익금이었다.
해외여행에서 쓰고 남은 외화를 인터넷을 통해 거래하는 것도 위험하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보이스피싱 자금 세탁에 연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 조직원들은 최근 온라인에서 미국 달러 등을 팔겠다는 사람에게 접근해 예약금 명목으로 구매 대금을 선입금하고 있다. 범죄 수익을 외화로 세탁하는 방식이다. 금감원은 관련 사례가 증가하자 최근 “웃돈을 제시하거나 사전 이체, 제3자 명의 이체를 할 경우엔 보이스피싱을 의심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 7월엔 보이스피싱 조직에 가상 계좌를 제공해 돈세탁을 도운 대가로 수수료 32억원을 챙긴 전자 지급 결제 대행사(PG)가 처음으로 적발됐다. PG사는 신용카드사와 직접 계약하지 못하는 영세 온라인 쇼핑몰 대신 결제 업무를 대신 해주는 회사다. 서울 동부지검 보이스피싱 범죄 정부합동수사단은 작년 10월까지 1년간 보이스피싱 및 불법 도박 운영 조직 등에 가상 계좌 4565개를 제공한 전자 결제 대행사 관계자 4명을 기소했다. 상품권 사업자들도 보이스피싱 조직의 주요 자금 세탁 경로다. 서울 서부지검은 지난 11일 보이스피싱 사기 조직 등이 피해자 26명에게서 빼앗은 143억원을 받아 상품권으로 세탁해 준 상품권 사업자를 구속 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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