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 책고집 대표 “인문학은 온기 전하는 학문…삶의 길을 잇는다”

양훈도 논설위원 2025. 9. 21.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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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클레멘트 코스 '디딤돌 인문학']
소외계층 인문학 교육과정 '클레멘트 코스'
한국, 2005년 첫 발…책고집, 올해 정부 사업
전국에 '디딤돌 인문학' 522개 강좌 개설 중
수강생 상 수여·전 과정 영상 아카이빙 계획

[복지·교육 융합 '디딤돌 인문학']
복지와 인문학 결합, 더 깊어지고 넓어지길
개인 뿐만 아니라 지역 정체성 확립 가능성
인구소멸지역일수록 인문학 활성화 됐으면
정부·기업·사회 합심 '인문학 거버넌스' 꿈

[경제적 자립 이전에 정서적 자립 먼저]
노숙인·자활참여자 등 치유·보살핌 선행돼야
마음까지 보듬는 동네 식당 같은 역할 하고파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 대표 /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 대표는 올여름을 정신없이 보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2025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인 '디딤돌 인문학' 522개 강좌를 조직해야 했기 때문이다. 최 대표가 이끄는 인문공동체 '책고집'이 '디딤돌 인문학' 사업을 맡았다. 지난 18일 수원화성의 장안문 근처 책고집으로 찾아가 최 대표를 만났다.

▲클레멘트 코스와 디딤돌 인문학 소개부터 해주시죠.

-클레멘트 코스는 미국의 극작가이자 교육자인 얼 쇼리스(Earl Shorris)가 1995년에 시작한 사회적 소외계층을 위한 인문학 교육과정입니다. 쇼리스는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만난 여성 재소자의 '우리가 가난한 건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이 프로그램을 구상했지요. 현재도 바드 칼리지(Bard College)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 최준영 대표가 지난 15일 전북 군산지역자활센터에서 '희망을 주는 인문학'을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사진제공=책고집

한국에서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5년, 서울역 노숙인을 대상으로 한 '성 프란시스 대학'이 문을 열었습니다. 첫 강의를 제가 맡았고요. 대학이라는 명칭을 썼지만, 제도화된 학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인문학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후 20년간 노숙인, 지역자활센터 이용자 등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교육이 산발적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올해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를 제도화하기로 하면서, 명칭 공모를 통해 '디딤돌 인문학'이라는 이름이 탄생했습니다. 인문학의 지혜가 절망과 단절의 계곡을 건너 삶의 길을 다시 잇게 해주는 디딤돌이라는 의미지요. 우리 책고집이 공개입찰에 응모해 이번 사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디딤돌 인문학' 사업 규모가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문체부가 애초에 사업을 구상하면서 전국의 노숙인 시설, 지역자활센터, 교도소 등 총 50곳을 대상으로 10강좌씩, 모두 500강좌를 계획했습니다. 웬만한 대학의 한 학기 전체강좌 수에 해당하지요. 시설과 접촉해 강좌 개설 승낙을 받고, 강사진을 구성하고 시간표를 짜는 일까지… 끝이 없는 전화 통화와 시행착오 끝에 8월 중순쯤 강좌 계획을 완성했습니다. 특히 교도소 섭외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전국의 교도소 16곳, 노숙인 시설 18곳, 지역자활센터 19곳 등 총 53곳에서 522개 강좌가 개설됐습니다. 문체부 계획보다 22강좌가 더 많습니다. 전체 강좌수와 강사가 많다 보니, 전국을 호남권, 수도권, 영남권, 충청권, 강원권, 제주권으로 나눠 운영하기로 했고요.

참여 강사만 해도 약 120명입니다. 국내 인문학자 중 연이 닿고 시간이 허락하는 분들은 거의 모두 흔쾌히 참여해주셨습니다. 이름을 대면 '아, 그 분도 참여했어?' 하실 분들이지요. 선생님들에게 지면으로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이 복잡한 일에 여름내 매달린 우리 책고집 인문공동체 분들에게도요.
▲ 임수정 강사가 지난 5일 수원 노숙인자활쉼터 해뜨는집에서 마음챙김과 자기돌봄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사진제공=책고집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12월 말까지 사업을 마무리해야 하기에, 차질 없이 강좌가 진행되도록 신경 쓰고 있습니다. 8월 하순부터 강좌가 시작되어 9월 중순 현재 130강좌가 진행됐습니다. 11월에는 참여자들과 함께하는 인문 여행을 계획 중이고, 수강생들이 쓴 글을 대상으로 '팬지문학상'을 수여할 예정입니다.

팬지는 꽁꽁 언 겨울을 지나 봄에 처음 피어나는 꽃입니다. 이름은 프랑스어 '팡세'에서 왔고, '생각들'이라는 뜻이지요. 디딤돌 인문학의 취지와 잘 맞아떨어집니다. 대상 수상자는 문체부 장관상으로 선정될 예정이고, 전 과정은 영상으로 아카이빙할 계획입니다.

▲디딤돌 인문학이 삶을 바꾸려면 어떤 정서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2005년 성 프란시스 대학 강의부터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거리의 분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해왔습니다. 철학이라기보다는 제 소신인데요. 경제적 자립 이전에 정서적 자립이 먼저라고 믿습니다. 치유와 보살핌이 선행되어야 해요.

저는 인문학이란 사람에게 온기를 전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찾지 않는 곳,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을 내가 먼저 찾아가자고 결심했지요. 초기엔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거창한 꿈은 내려놓았습니다. 다만 진정으로 곁에 있어 주고, 볕이 되어주자는 마음으로 강의합니다.

동네 식당은 허기뿐 아니라 텅 빈 마음도 달래주잖아요. 저는 그런 동네 식당 같은 인문학을 하고 싶습니다. 기억에 남는 분도 있어요. 시흥의 노숙인 자활시설을 방문했을 때, 한 선생님이 '내가 지은 밥의 온기로 희망을 갖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일은 해볼 만하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그런 자세로 인문학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최 대표는 2023년 교보교육재단이 수여하는 교보교육대상 '참사랑육성' 부문 대상을 받았다. 그의 소박한 소신이 통했나 보다. 그는 독서가로도 이름이 높다. 2023년 문화체육관공부가 주관하는 독서문화상 국무총리 표창도 수상했다.)

▲최 대표가 2014년부터 하고 있는 책고집도 그렇고, 올해 맡은 디딤돌 인문학도 그렇고 복지와 교육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적 접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복지 시스템과 인문학이 만날 때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보건복지부는 국민의 건강과 생계에 집중하고, 문체부와 교육부는 삶의 질 향상에 초점을 둡니다. 물론 복지부도 넓은 의미에서 삶의 질을 말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생계보장이 중심이지요. 그런데 생계와 삶의 질은 함께 가야 합니다.

복지부에서도 최근에는 정서를 어루만지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기 시작했어요.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는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 왔고, 그 성과의 연장선상에서 문체부가 디딤돌 인문학 사업을 시작한 겁니다. 앞으로 복지와 인문학의 결합이 더 깊어지고 넓어지기를 기대합니다.
▲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 책고집 대표가 지난 20여 년간 만난 노숙인·재소자 등의 이야기를 쓴 '가난할 권리' 책을 들고 수줍게 웃고 있다./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디딤돌 인문학이 구조적으로 제도화되는 데 필요한 과제는 무엇일까요.

-최근의 경험부터 하나 말씀드릴게요. 영남권 어느 자활 기관에 전화해서 인문학 강좌를 열 수 있는지 물었더니, 담당자가 "우리 기관은 그런 거 안 한다"고 딱 자르더군요.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하자, "지식인들을 위해 우리 센터 이용자들을 동원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하면, 어느 대학에서 인문학 강좌를 이곳에서 진행했는데, 교수들이 와서 참여자들의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만 강의하고 끝났다는 겁니다. 대학이 프로젝트 따서 명성 높이는 식으로 인문학을 이용했다는 것이지요.

디딤돌 인문학은 이런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함정에 빠질 일은 없습니다. 다만 내년에도 디딤돌 인문학이 더 진행될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정치인들은 노숙인이나 자활 참여자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더군요. 왜냐하면 표가 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대통령은 가난이 무엇인지 잘 아는 분 같고,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마음의 가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걸 이해하는 분이라고 봅니다. 디딤돌 인문학이 단발로 끝나지는 않겠구나 하는 예감은 하고 있습니다. (웃음) 정부 부처들과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의 미래를 걱정하는 인문학자들이 더 깊이 연구하고 머리를 맞대면 좋겠습니다.

저는 디딤돌 인문학이 지역의 문화적 흐름도 바꿔놓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인문학을 통해 지역을 지키는 분들이 더 확실한 정주의식을 갖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지역의 정체성도 확고하게 만들어 나갈 가능성이 커지니까요. 인구소멸지역일수록 인문학이 활성화되면 좋겠다는 게 제 소망입니다. 실제로 인구소멸 위험지역 지역자활센터의 인문학 강좌 만족도가 높게 나타납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최 대표는 기업들이 인문학 강좌를 더 쉽게 후원할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부의 제도화가 내년에도 이어지고, 기업들은 후원에 나서고, 지역사회와 개인이 힘을 보태는 '인문학 거버넌스'가 최 대표만의 꿈은 아닐 듯하다.

/양훈도 논설위원 brock333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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