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아침을 읽다] 자동판매기 - 정계원

강동우 2025. 9. 2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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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무릎 밑에 /직립의 맹수들이 일렬로 서 있다

뼈를 발라내기 시작한다 /캔, 맥주 /오렌지 /봄, 한 조각마저 /그의 갈비뼈 하나 둘 잘려 나가는 /오후 2시 /선지피, 한 모금 /봉봉 /사과즙 /암사자가 /꽃사슴의 푸른 영혼을 발라먹듯

하이에나들의 식사 /우주가 쨍, 금이 가는 소리

▶ 정계원의 시 '자동판매기'는 일상의 사물인 '자판기'를 중심으로 현대 문명을 해부한다. 시인은 자판기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을 "직립의 맹수들"이라 부른다. 인간이 문명과 질서를 대표하는 존재라기보다 오히려 원초적 본능에 따라 사냥하는 포식자로 환원되는 순간이다. 자판기라는 문명의 기계는 '간편한 섭취'를 제공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그것이 뼈와 살을 발라내는 폭력의 장면처럼 보인다.

자판기에서 나오는 캔 음료와 주스들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뼈를 발라내는" 생명 착취의 결과물로 제시된다. '캔, 맥주, 오렌지, 봄, 갈비뼈'와 같은 병렬적 나열은 기호품과 생명의 단편을 뒤섞음으로써 소비 행위가 곧 타자의 생명력 침탈임을 드러낸다.

게다가 "봄"과 같은 계절조차 상품화하고 있는 현실은 인간 감정과 자연의 본질마저 소비의 대상이 된 상황을 풍자한다. 이때 '암사자가 꽃사슴의 영혼을 발라먹듯', '하이에나들의 식사'라는 구절은 소비 장면을 잔혹한 사냥 장면으로 치환하면서, 자판기를 통한 소비가 결국 약자의 희생 위에서 작동하는 폭력임을 상기시킨다.

특히 마지막의 "우주가 쨍, 금이 가는 소리"는 사소한 한 잔의 음료 소비조차 생태계 전체의 균형을 흔드는 파괴적 행위임을 함축한다. 자판기라는 일상의 작은 기계가 사실은 거대한 착취 체계, 생태 위기의 은유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 시는 생태시적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

결국 이 시는 현대의 소비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인 구조 위에 서 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낸 작품이다. 자판기는 문명의 편리함을 제공하는 기계가 아니라 우리 시대 욕망과 폭력의 축소판이다. 시인은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낯설게 뒤집음으로써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소비 행위에 내재한 '포식의 폭력'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쨍" 하고 나오는 물건 소리가 충격적으로 들리는 이유이다.
▲ 강동우 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 교수

/강동우 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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