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중독 이렇게 무섭다…나라는 신용등급 강등, 국민은 긴축 재정 반대 ‘저항’
佛 신용등급, 한국보다 낮아져…GDP 대비 누적 국가부채 114% 육박
(시사저널=이지온 유럽 통신원)
프랑스의 재정과 정치는 그야말로 혼돈에 빠져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불과 1년 사이 네 번째 총리를 임명했지만, 재정 적자는 이미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으며 국가 차입 비용은 끝없이 치솟고 있다. 의회는 내년도 예산안을 두고 여전히 교착상태 속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피치, 프랑스 신용등급 'AA-'에서 'A+'로 강등
이런 가운데 9월12일 국제신용평가사 피치(Fitch)는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기존 'AA-'에서 'A+'로 강등했다. 이는 주요 평가사 기준으로 사상 최저 수준이며, 한국보다도 낮은 등급이다. 피치는 성명에서 "프랑스의 부채는 2027년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며 단기간 내 부채 안정화 전망은 불확실하다"고 지적했다. 정치적 불안정과 재정 개혁을 둘러싼 갈등이 겹친 결과라는 것이다. 프랑스가 여전히 세계경제의 핵심 축임에도 수십 년간 누적된 구조적 재정 문제를 외면해온 대가가 현실로 드러난 셈이다.
프랑스의 재정 불안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가 마지막으로 균형재정을 달성한 것은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관대한 복지국가 모델과 강력한 노동자 보호 제도는 정치적 합의 속에 유지됐지만, 안정적 성장과 초저금리 환경 덕분에 적자는 관리 가능한 수준에 머물러 왔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가부채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90%를 넘었지만, 투자자 신뢰와 양호한 차입 여건이 이를 버티게 해왔다.
문제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다. 대규모 지원책으로 가계와 기업을 지탱했지만, 결과적으로 2019년 GDP 대비 98%였던 부채가 2020년 114%까지 치솟았다. 이후에도 재정 건전성은 개선되지 못했고 고령화에 따른 연금 부담, 사회보장 지출 확대, 에너지 전환 비용 등이 더해졌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까지 겹치자 국가 재정은 사실상 '만성 적자' 구조로 고착됐다.
지난해 재정 적자는 GDP 대비 5.8%에 달했다. 이는 유럽연합이 정한 회원국 재정 적자 상한선 3%를 훌쩍 넘어선 수치다. 반면 독일이나 네덜란드 등은 긴축 기조를 강화하며 재정 균형을 회복해 나가는 중이다. 정치적 부담과 사회적 반발을 이유로 지출 감축을 미뤄온 결과, 프랑스는 결국 신용등급 강등이라는 경고음을 피하지 못했다.
재정 위기의 압박은 곧 정치 불안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의 조세부담률은 GDP의 43.8%로 EU(유럽연합) 최고 수준이지만, 지출은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다. 연금과 공공부문 임금, 국방비 증액이 재정을 압박하는 가운데 증세와 지출 삭감 없이는 균형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정치적 합의는 번번이 무산됐다.
지난 7월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는 공휴일 이틀 폐지와 440억 유로(약 70조원)에 달하는 지출 삭감을 포함한 긴축안을 내놨다. 하지만 이는 곧 여론과 야당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바이루는 자신의 긴축안에 대한 신임을 묻는 투표를 요청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364대 194라는 압도적 표 차이로 불신임이 가결되며, 제5공화국 역사상 최초로 총리가 제안한 신임투표에서 정부가 붕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재정 문제를 둘러싼 갈등 속에 의회를 하나로 뭉치게 하려던 그의 승부수는, 오히려 분열의 깊이를 드러내는 결과로 나타났다.
바이루 내각의 몰락은 프랑스가 직면한 재정 위기를 정치적 파국으로까지 확산시켰다. 불과 나흘 후, 피치는 프랑스의 등급을 강등하며 "신임투표 패배는 정치적 분열과 양극화가 심화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 불안정성은 실질적인 재정 통합 능력을 약화시키며 2029년까지 재정 적자를 GDP 대비 3% 수준으로 줄이기는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실제 프랑스는 지난 1년 동안 가브리엘 아탈, 미셸 바르니에, 프랑수아 바이루 등 총리가 연이어 교체되며 네 번째 정부를 맞이했는데, 정치적 불확실성이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마저 흔든 셈이다.

'공휴일 축소안' 등 개혁안 줄줄이 후퇴
정치적 혼란은 곧 사회적 분노로 이어졌다. 지난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여당이 극우 세력에 참패한 이후, 마크롱은 조기 총선을 단행했는데, 좌파 연합 '신인민전선(NFP)'이 절대 과반을 확보하진 못했지만 최다 의석을 차지하며 극우당의 비상을 막았다. 제5공화국의 정치 관행상 대통령은 다수파가 지명한 총리를 임명해야 했지만 마크롱은 이를 무시하고 우파 출신 미셸 바르니에를 총리로 임명했는데, 이는 민심과 더욱 괴리된 선택으로 평가됐다. 바르니에 내각은 불과 3개월 만에 '불신임' 당했고, 결국 바이루 내각 역시 '부자 증세 없는 서민 희생안' '노년층과 취약계층에 불리하다'는 비판 속에 긴축 논란이 일면서 무너졌다.
특히 공휴일 폐지안은 프랑스 사회의 금단의 영역을 건드렸다. 9월10일 전국적으로 열린 '모든 것을 막자(블록 에브리싱)' 시위에는 17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시위대는 도로와 철도를 봉쇄했고, 곳곳에서 방화와 충돌이 발생했다. 파리에서는 "마크롱 퇴진" 구호가 울려 퍼졌으며, 루브르 박물관은 일부 전시실을 폐쇄해야 했다. 노동총동맹 등 주요 노조는 "정부가 고소득층과 대기업 과세를 회피한 채 서민만 희생시키고 있다"고 규탄하며 총파업 가능성을 경고했다.
결국 바이루 내각이 무너진 직후 마크롱은 하루 만에 최측근 세바스티앙 르코르뉘를 총리로 지명했지만, 야당과 여론은 즉각 반발했다. 내각 교체가 반복될 뿐 구조적 해법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불신이 짙게 깔려있다.
르코르뉘 신임 총리는 취임 직후 공휴일 폐지안을 철회하며 민심 달래기에 나섰다. 대신 지방정부 재정 자립 강화, 전직 고위공직자 특권 폐지, 정부 조직 개편 등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정치권은 여전히 극심하게 분열돼 있다. 극우 국민연합(RN)은 차기 정권 교체만을 바라며 협력 의사가 없고, 좌파 LFI는 마크롱 퇴진을 통한 조기 대선을 노리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구조적인 데에 있다. 부채 상환 비용은 이미 교육 예산을 뛰어넘었으며, 국방비 증액까지 겹쳐 재정 여력은 더욱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 프랑스가 EU 차원에서 공동 차입을 제안하더라도, 다른 회원국들이 '재정 관리 능력조차 없는 파트너'와 위험을 공유할 리 만무하다.
프랑스의 재정 위기는 단순한 숫자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리더십, 사회적 합의, 국제적 신뢰가 동시에 시험대에 오른 총체적 위기다. 과연 마크롱 정부와 새 총리가 이 난국 속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지, 프랑스의 앞날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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