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중과 상연》, 무엇이 ‘워맨스’에 열광하게 하나

정덕현 문화 평론가 2025. 9. 20.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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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과 질투, 애정과 연민이 교차하는 ‘우먼+로맨스’의 부상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여성 간 서사의 재발견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멜로는 여전히 한국 드라마의 중심축이다. 하지만 최근 멜로 사이를 파고드는 워맨스(우먼+로맨스, 여자들 사이의 진한 우정과 유대)가 주목받고 있다. 우정이라고만 하기엔 더 깊은 워맨스의 세계는 또 다른 멜로의 확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드라마 《은중과 상연》 포스터 ⓒ넷플릭스

멜로, 브로맨스 그리고 워맨스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은 은중(김고은)과 상연(박지현)이 초등학생 시절 처음 만나 대학과 사회생활을 거쳐 끝내 죽음으로 이별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개인의 삶을 그리지만 동시에 일대기가 담겨있어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시대상을 반영한 시대극적 성격도 들어있다. 또한 은중이 상연의 오빠 천상학(김재원)을 짝사랑하는 이야기나, 대학 사진 동아리 선배인 김상학(김건우)과의 사랑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은중과 김상학의 멜로는 그 사이에 상연이 개입하면서 우정과 사랑이 충돌하고,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는 과정들이 담겨있다. 그러나 《은중과 상연》이 진정 그리고자 하는 건 시대극의 향수도 아니고, 남자를 둘러싼 두 여성의 멜로도 아니다. 만약 그런 평범한 멜로였다면 《은중과 상연》이 15부작이라는 긴 호흡으로 제작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집중하는 건 제목처럼 은중과 상연의 관계 변화다. 포스터에 적힌 '선망과 원망 사이'라는 문구처럼 두 여성은 서로의 삶을 선망하고 동경하며 질투한다. 처음에는 환경 차이에서 비롯된 동경과 질투였지만, 두 사람의 삶이 역전되면서 관계 역시 흔들린다. 이들은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듯한 경쟁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한편으로는 서로를 챙기고 애정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상처를 주고받으며 독특한 워맨스를 형성한다.

로맨스에서도 서로 으르렁거리며 발전하는 '혐오 관계 로맨스'가 있듯, 이 작품은 '혐관 워맨스'를 보여준다. 복잡한 감정 속에 얽힌 두 사람의 관계는 상연이 말기 암으로 안락사를 선택하는 순간, 비로소 완전한 워맨스로 마무리된다. '너 때문'이라던 감정은 '네 덕분'으로 바뀌고, 독하게 주고받던 말들조차 서로에 대한 애정을 증명하는 순간으로 환원된다.

멜로보다 워맨스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은중과 상연》은 남녀의 사랑을 넘어 인간 대 인간의 서사로 확장된다. 사랑 이야기가 곧 사람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최근 멜로가 휴먼 드라마로 확장되는 흐름이 있지만, 워맨스는 여성 간 관계성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다른 결을 보여준다.

멜로만큼 끊임없이 그 영역을 확장한 장르가 있을까. 적어도 한국 멜로에는 뚜렷한 변화들이 있었다. 가부장적 시대엔 집안의 반대 속 결혼 이야기가 주류였다. 1990년대 말에는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라고 불리는 트렌드를 멜로와 결합한 형태의 작품들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신데렐라나 캔디 서사의 멜로들이 신분 상승을 꿈꾸는 여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에 대한 비판 의식들이 생겨나면서, 일과 사랑을 모두 쟁취하는 능동적인 여성 주인공이 등장했다. 또 지나치게 사적인 멜로가 외면받자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은 '사회적 멜로'도 시도됐다. 결국 남녀가 등장하는 드라마라면 사랑 이야기는 당연히 포함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서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멜로는 상투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장르다.

하지만 남녀 간 사랑을 다룬 멜로나 남성의 의리와 우정을 그린 브로맨스와 달리, 여성 간 관계를 그린 워맨스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오히려 드라마 속 고부 갈등이나 '여성 상사-여성 부하' 구도는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엇나간 관점까지 낳았다. 특히 직장생활에서 여성 부하직원을 핍박하는 여성 상사 같은 구도는 남성 시스템의 대리자로서 기능하는 여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최근 잦아진 워맨스는 단순한 트렌드 이상의 의미가 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희도(김태리)와 유림(김지연)은 라이벌이면서도 서로를 성장시키는 모습을 보여줬고, 《마인》의 희수(이보영)와 서현(김서형)은 금지된 사랑의 절절함을 그려냈다. 《더 글로리》의 문동은(송혜교)과 강현남(염혜란)은 각기 다른 학교폭력 피해자와 가정폭력 피해자로 만나 연대를 만들었고, 《굿파트너》의 차은경(장나라)과 한유리(남지현)는 이혼 전문 선후배 변호사로서 협력했다. 《정년이》의 윤정년(김태리)과 허영서(신예은)도 마찬가지다. 여성 국극 무대에서 경쟁하면서도 아름다운 우정을 보여줬다. 이처럼 워맨스는 멜로나 브로맨스에 비해 소외됐던 여성 간의 특별한 관계를 채워주고 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스틸컷 ⓒtvN

우정 그 이상, '연대'로서의 워맨스

최근 드라마에서 워맨스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JTBC 토일드라마 《백번의 추억》은 버스 안내양 영례(김다미)와 종희(신예은)의 워맨스를 중심에 뒀다. 글로벌 화제를 모은 《폭군의 셰프》에서는 연지영(윤아)과 이헌(이채민)의 혐관 로맨스 못지않게 요리 보조 서길금(윤서아)과의 워맨스가 돋보인다. 깨어나 보니 기억이 지워져 25년이 훌쩍 지나버린 봉청자(엄정화)와 그를 기억하는 형사 독고철(송승헌)의 세월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금쪽같은 내스타》에도 봉청자와 민태숙(차청화)의 끈끈한 워맨스가 빠지지 않는다. 멜로만큼 중요해진 워맨스라는 코드가 이 시대가 요구하는 관계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앞서 말했듯 워맨스를 단순히 여성 간 우정으로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브로맨스가 의리와 우정의 다양한 서사를 담지만, 워맨스에는 아직 다양한 서사가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남성의 위치에 여성을 대입하는 방식으로는 워맨스를 규정할 수 없다. 여성들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독자적인 사회적 현실들이 들어있고, 따라서 그 관계성도 브로맨스와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글로리》의 문동은과 강현남처럼 피해자로서 연대하는 워맨스가 대표적 사례다.

결국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멜로는 어디서나 등장한다. 중요한 건 그 관계가 상투적인 관계에 굳어져 하나의 '정상성'으로 각인될 때의 위험성이다. 다양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지금, 사랑 역시 다양한 양상을 담아내야 한다. 곳곳에서 피어나는 워맨스의 만발이 반가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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