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략을 잘못 답습한 한미 관세협상[4강의 시선]
편집자주
요동치는 국제 상황에서 민감도가 높아진 한반도 주변 4개국의 외교, 안보 전략과 우리의 현명한 대응을 점검합니다.
납득하기 힘든 미일 관세협상
다급하고 안일했던 한국 정부
'피크 코리아'의 불안한 미래

9월 4일 미국과 일본은 5,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을 제도적으로 담보하기 위한 별도 문서를 작성했다. 합의문에 따르면 투자 프로젝트는 미국 상무장관이 의장을 맡는 위원회가 추천하고, 대통령이 최종 승인한다. 집행은 미국이 설립한 특별목적법인(SPV)을 통해 이뤄지며, 초기 수익은 양국이 절반씩 나누지만, 상환이 끝나면 미국이 90%를 가져가도록 설계됐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특정 투자를 지정하면 일본은 45영업일 이내에 미국 측 계좌로 송금해야 하며, 자금 제공을 지연하거나 거부할 경우 관세가 다시 인상될 수 있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아무리 포장해도 일본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평등 조약임이 분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관세 협정을 투자 협정으로 치환한 쪽은 미국이 아닌 일본이었다. 지난 2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이시바 총리는 대미 직접투자 누적액(2024년 말 기준 8,192억 달러)에 2,000억 달러를 추가해 1조 달러로 늘리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협상 과정에서 투자 금액은 4,000억 달러로 늘었고, 최종적으로는 5,500억 달러까지 확대되었다. 일본이 협상 프레임을 바꾸려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를 피하기 위해 해외투자를 늘려온 일본은 1989년부터 33년 연속 세계 최대 순자산국 지위를 지켜왔다. 경상수지 흑자의 대부분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이자·배당으로 이뤄지는 만큼, '투자대국 일본'이 협상을 투자 중심으로 끌고 간 것은 전략적으로 이해 가능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번 합의의 구체적 내용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합의된 5,500억 달러는 지분투자도, 당초 일본이 설명한 융자나 보증 형태도 아니다. 트럼프 임기 내에 미국이 운용하는 투자 펀드 계좌로 자금을 입금해야 하는 방식이다.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조 3,000억 달러가 넘지만, 대부분 미국 국채 같은 장기 자산 형태로 묶여 있고, 곧바로 투자에 활용할 수 있는 현금성 자산은 1,600억 달러에 불과하다. 나머지를 단기간에 마련하려면 국채 매각이나 외환시장 개입이 불가피하며, 이는 국채 금리와 환율에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일본은 왜 이런 불리한 합의를 수용했을까.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째,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별도의 이면계약이 존재하는 경우다. 둘째, 말 그대로 백기 투항을 한 경우다. 만약 이면계약이 없다면, 일본은 플라자 합의 때처럼 미국에 줄서기 위해 또다시 국부를 갖다 바쳤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문제는 한국이다. 우리는 협상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국내 정치 불안정에 발목이 잡힌 채 머뭇거리던 한국은 일본이 먼저 협상을 끝내자 다급해졌고, 결국 투자 규모를 제외하고 일본과 거의 동일한 조건으로 미국과 합의했다. 일본이 짠 협상 틀에 스스로 올라탄 셈이다. 그 속에는 일본보다는 조금 더 유리한 조건을 받아내야 한다는 경쟁심과, 트럼프 임기 안에 모든 투자가 실제로 집행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기대가 섞여 있었다.
지난해 말 기준 한국의 대미 직접투자 누적액은 약 800억 달러로 일본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3,500억 달러 추가 투자를 약속했다는 것은 기존 규모의 네 배 이상을 새로 조달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 외환보유액(약 4,100억 달러)의 85%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으로, 애초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일정 기간 관세를 감수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안보 우산에 의존하는 한국이 트럼프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은 일본처럼 미국과의 상설적이고 충분한 규모의 달러 스와프를 확보하는 길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천문학적인 달러 빚 속에서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이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 해법이 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것은 '피크 코리아'가 현실화될지 모르는 불안한 미래다.

이창민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당원 명부 압수당한 국힘 "특검 고발" 민주 "통일교 연루 땐 정당해산" | 한국일보
- 전자발찌 차고 휠체어 탄 김건희… 구속 후 병원서 첫 포착 | 한국일보
- 홍준표 "국민의힘, 통일교·신천지에 지배된 꼭두각시 정당" | 한국일보
- 진도항서 처자식 숨지게 한 가장 '무기징역'…판결문 읽던 판사도 눈물 | 한국일보
- "8kg 됐어요"… 국내 최초 자연임신 '오둥이' 첫돌 맞았다 | 한국일보
- 강성일수록 지지율 상승? '포스트 이재명'에 조국·장동혁 오차범위 1,2위[한국갤럽] | 한국일보
- "바닥에 둬서 안 먹어" 7만 원어치 배달음식, 돌연 취소… 무슨 일? | 한국일보
- [단독] 한학자 "권성동에 세뱃돈 100만원… '윤석열-윤영호 만남' 보고 받아" | 한국일보
- "나도 롯데카드 있는데?" 문자 받아도, 앱으로 정확한 유출정보 확인해야 [Q&A] | 한국일보
- "여보 저 사람 지금"… 쉬는 날 밥 먹다 음주운전자 잡은 경찰 부부 |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