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저격 미니북 ‘○○○ 시리즈’

서정민 2025. 9. 20.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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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 트렌드 ‘작고 가벼운 책’
B6·A6 사이즈의 휴대가 간편한 소형 책자를 ‘문고판’ 또는 ‘페이퍼백’이라고 한다. 과거 문고판 제작은 시·소설 등 문학 명작의 대중적 보급이 목표였다. 하지만 요즘은 ‘취향을 중심으로 한 작고 가벼운 책’으로 그 의미가 확산됐다. 여기에는 2017년 출판된 ‘아무튼’ 시리즈가 큰 몫을 했다.

“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한 가지를 주제로 세 출판사가 같이 에세이 시리즈를 만들자.”

2017년 코난북스, 위고출판사, 제철출판사 등 1인 출판사 세 곳이 모여 공동의 브랜드를 만들고 시작한 것이 ‘아무튼’ 시리즈다. 사실 작은 출판사들은 대형 출판사와 계약된 잘 나가는 저자들과 일할 기회가 쉽지 않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유명인들로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주제로 한 짧은 에세이 원고를 받아 책으로 엮어보자는 것이었다. 젊은 작가들과의 조우도 목표였다. 인권운동가 류은숙의 『아무튼, 피트니스』, 목수 김윤관의 『아무튼, 서재』, 약사 장성민의 『아무튼, 게스트하우스』, 일러스트레이터 조성민의 『아무튼, 쇼핑』,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저자 김민섭의 『아무튼, 망원동』이 1차분으로 출판됐다. 올해 8월에는 시리즈의 78번째 책으로 의사 출신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재영의 『아무튼, 맛집』이 나왔다.

독자들은 가볍게 수다 떠는 즐거움
‘아무튼’ 시리즈. 전 78권.
독자들의 반응은 “신선하다”가 주를 이뤘다. 누군가의 취향이 나와 닮았다는 건 맘에 맞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와 같은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튼’ 시리즈는 출판계에 하나의 전형이 됐다. 주제도 가볍고, 사이즈도 가벼운 책들이 속속 뒤를 이었고 최근 1~2년 사이에는 인문학으로까지 기획이 확장됐다.
‘나에게’ 시리즈. 전 4권.
올해 처음 선보인 몽스북의 ‘나에게’ 시리즈는 ‘내 인생에 기쁨을 주는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다. 잡지 여성중앙의 마지막 편집장이었던 안지선 대표는 잡지시절 경험에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했다. “지금의 출판시장은 유명 작가·인플루언서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죠. 하지만 찾아보면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분야의 숨은 고수들이 많아요. 잡지에선 글은 잘 못 쓰지만 정원을 잘 가꾸는 사람, 옷을 잘 입는 사람 등등 그들만이 가진 멋진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하죠. 이들에게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자기 이야기를 써보게 하자 생각했어요.”

『명상이 나에게』는 현대카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등의 히트 광고 캠페인을 기획하고 베스트셀러 마케팅서 『이것은 작은 브랜드를 위한 책』을 낸 광고 전문가 이근상의 솔직하고 생생한 10년 명상의 기록이다. 『수영이 나에게』는 신문기자로 20년 넘게 일해 온 김찬희가 수영이라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삶을 바라보는 감성 에세이로 힘든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수중 유머이자 인생의 은유가 가득하다.

작고 가벼운 책 만들기는 비즈니스 면에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종이 누수 없는 작은 사이즈에 흑백 인쇄를 하고, 디자인도 욕심 부리지 않고, 홍보용 띠지도 없애면 제작비는 가벼워진다. 일단 시리즈 이름을 각인시키면 책 한 권을 낼 때마다 드는 홍보·마케팅 비용도 절약할 수 있다. 안 대표는 “요즘처럼 지하철에서 다들 휴대폰만 보는 때에 가방에 책 한 권쯤 넣고 다니면서 보면 내가 꽤 근사한 사람처럼 여겨져서 기분도 좋아진다”고 했다.

‘띵’ 시리즈. 전 28권.
이런 시리즈 책들은 기획력이 빛나는 책이라 출판사 브랜딩에도 도움이 된다. 세미콜론의 ‘띵’시리즈는 현재 28권까지 출판됐는데 주제가 모두 ‘음식’이다. 세미콜론은 민음사 출판그룹의 만화·예술 브랜드였지만 2019년부터 『실버 스푼』 같은 굵직한 요리책을 시작으로 라이프스타일 분야를 확장하면서 새로운 브랜딩이 필요했다. ‘띵’ 시리즈를 기획한 김지향 부장은 “매일 챙겨 먹어야 하는 끼니는 번거롭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기쁨이자 행복”이라며 “‘띵’이라는 시리즈 명은 짧지만 입에 딱 붙는 제목을 위해 팀원들끼리 고민하다가 우연히 나온 단어”라고 했다. “누군가 ‘살면서 머리가 띵 할 때 맛있는 것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나요’ 했던 것 같아요.(웃음) 생각해보니 전자레인지나 에어프라이어가 요리가 다 됐다고 알릴 때도 ‘띵’ 소리를 내잖아요. 이거다 했죠.”

음식 에세이지만 ‘맛있는 음식’이나 ‘맛집’을 소개하는 책은 아니어야 했다. 해당 음식에 기호가 없는 사람들은 재미없어 할 게 뻔하니까. 작가들에게 문을 두드릴 때도 “내가 ○○을 좋아하지만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건 아니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음식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매개체일 뿐 진짜 내용으로는 개인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삶의 태도까지도 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치즈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회사에서 너무 답답하고 힘들 때 잠깐 탈출해서 편의점에서 싸구려 치즈 하나 사먹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띵’ 시리즈의 캐치프레이즈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다.

‘미각’ 시리즈. 전 4권.
음식을 주제로 하되 인문학과 역사가 곁들여지면 또 어떤 모습일까. 문학동네의 ‘미각’ 시리즈는 인문학자들이 쓰는 음식 이야기다. 첫 편 『중화미각』부터 『부산미각』 『종로미각』까지 출판사 편집자와 함께 기획하고 글을 쓴 부산대 중어중문학과 최진아 교수는 “다른 나라를 먼저 알려고 할 때 가장 자연스러운 교량이 음식”이라며 “맛있으면 궁금해지고, 알고 먹으면 더 맛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중화미각』은 한국중국소설학회 인문학자 열아홉 명이 중국 역사·문학 속 스무 가지 음식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다. 최 교수는 “중국이 미워도 한국의 중국집·마라탕집은 망하지 않는 건 이데올로기에 우선하는 것이 음식문화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산미각』은 부산대 중어중문과 학연으로 모인 인문학자 열네 명이 돼지국밥·꼼장어 등 부산의 맛과 역사를 풀어낸 책이다. 한자로 된 옛 문헌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저자들이 전하는 한·중·일 식문화 비교도 읽는 재미가 크다.

흑백 인쇄, 단출한 디자인…제작비도 절감
『종로미각』은 K푸드의 역사를 톺아보는 책이다. 이문설농탕·한일관·열차집 등 50년 이상 전통을 이어가는 노포 맛집부터 족발·낙지볶음·삼계탕·돈가스 등 전국에서 사랑 받는 메뉴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음식이 종로에서 탄생했다. ‘맛잘알’ 인문학자 열네 사람이 사대문 안 곳곳을 누비며 근대부터 현재까지 사랑 받고 있는 다양한 음식에 얽힌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풀었다. 설렁탕·치킨·닭한마리칼국수·선지해장국·떡볶이·약과·막걸리·소주 등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K푸드의 역사가 맛깔나게 전해진다. 이번 주에는 『제주미각』도 출판된다. 요즘처럼 로컬 컬처가 중요한 때 지역 문화 콘텐트와 음식 이야기를 인문학과 함께 읽는 재미는 맛 이상, ‘아는 자’의 행복까지 누리게 한다.

복복서가의 ‘지식산문 ○’ 시리즈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물들이 품고 있는 놀라운 이야기가 컨셉트다. 복복서가의 김수현 과장은 “영국 블룸즈버리 출판사의 스테디셀러 ‘오브젝트 레슨스’ 시리즈 가운데 흥미로우면서도 새로운 사고를 촉발하는 책들을 선별했다”며 “사물에 관한 인문 에세이로 독자들은 늘 곁에 있는 물건들, 그래서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의 숨겨진 이야기에 ‘오’ 하고 놀라는 동시에 교양을 쌓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현재 이 시리즈는 『여행가방』 『퍼스널 스테레오』 『트렌치코트』 『기념품』 『유아차』 『임신테스트기』 6권이 출판됐고 차례로 인형·청바지·쇼핑몰·침묵·먼지·책꽂이 등이 출간 예정이다.

‘지극히 사적인’ 시리즈. 전 6권.
틈새책방이 기획한 ‘지구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는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한국인 친구에게 자기 나라를 소개한다는 콘셉트다. 독자들 사이에선 ‘지극히 사적인’ 시리즈로 유명한데 역사학이 전공인 이민선·이해진 두 공동대표가 “JTBC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을 재밌게 보면서 휘발성 있는 방송 말고 책으로 진지하게 담아내자”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시리즈 초기 저자들이 ‘비정상회담’ 출연자인 알베르토 몬디, 오헬리엉 루베르, 수잔 샤키야 등인 이유기도 하다.

이 대표는 “한국 생활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들었던 질문, 나누었던 이야기, 자국에 대한 오해 등을 담았다”며 “한국인이 궁금해 할만한, 하지만 쉽사리 물을 수 없었던 민감한 이야기들은 출판사가 대신 질문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정부의 이민 정책, 네팔 민주주의의 혼란, 일본 천황의 영향력과 역사 문제 등이다. “제목에 ‘지극히 사적인’을 붙인 이유는 개인의 경험과 시선에서 출발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한 나라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일은 불가능하죠. 실제로 이 시리즈 저자들도 ‘지극히 사적인’이라는 전제가 아니었다면 책 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해요. 자신의 서술로 인해 모국이 오해는 받지 않을지 부담도 컸으니까요. 이들의 이야기가 다른 나라의 정체성과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단초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사건 현장에 있습니다’ 시리즈. 전 3권.
방안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두뇌 추론으로 스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는 중앙북스의 ‘당신은 사건 현장에 있습니다’ 시리즈는 천재 크리에이터 모데스토 가르시아가 기획한 독특한 시리즈로 독자들을 추리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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