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세계가 美 투자한 돈보다 커… 韓, 보증·대출 ‘영끌’해도 버겁다
한미 관세 협상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3500억달러(약 488조원)를 단기에 직접 투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우리나라의 역대 대미 해외직접투자(FDI) 금액과 비교해도 확인된다. 당초 정부가 얘기한 대로 보증, 대출 등으로 대부분 마련한다고 해도 힘든 일인데, 이 정도 규모의 투자금을 현금으로 조달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란 말이 나온다.
19일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해외직접투자 제도가 시행된 지난 1968년부터 올해 상반기(1~6월)까지 57년간 우리나라가 미국에 직접 투자한 금액은 2563억달러(약 358조원)다. 역대 우리나라의 기업, 정부, 국책은행 등이 미국에 투자한 돈을 모두 합해도 3500억달러에 1000억달러 가까이 못 미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미 직접투자액은 1980~1990년대엔 연평균 1억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급증하기 시작해 2016년 100억달러를 돌파했다. 2022년엔 298억달러(약 42조원)를 투자해 역대 가장 큰 금액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국내 주요 대기업의 실적 부진으로 대미 직접투자액은 꾸준히 감소해 작년 224억달러 수준까지 줄었다.
작년 대미 직접투자액을 기준으로 할 때, 3500억달러를 투자하려면 15년이 넘게 걸린다.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던 2022년을 기준으로 해도 11년 넘게 투자해야 한다.
◇전 세계가 한 해 美에 투자한 금액보다 커
3500억달러는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지난해 미국에 직접 투자한 금액보다도 많은 돈이다.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미국이 2023년과 지난해에 해외로부터 받은 직접투자액은 각각 2974억달러(약 414조원), 2923억달러로 3500억달러보다 적다. 미국으로의 FDI 금액은 트럼프 행정부 1기 때인 2017~2020년에도 연평균 2275억달러 정도였다. 반도체법(칩스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을 시행하며 대대적인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주면서 해외 투자를 적극 유치했던 바이든 행정부 때도 이 규모는 3500억달러보다 적었다. 바이든 때 미국의 연평균 FDI 유입액은 3334억달러였다.
◇정부, 美에 “한일 여건 다르다”고 설명
정부는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을 미국에 급파해 “한국과 일본은 거시 경제 상황이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에 앞서 미국에 5500억달러를 대부분 현금 출자 방식으로 투자하기로 했다.
19일 여한구 본부장은 인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일본과 한국이 다르다는 점을 여러 가지 객관적 자료와 분석을 제시하며 최대한 설득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이 요구하는 ‘일본식 3500억달러 대미 투자 약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적 배경을 설명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기축통화인 엔화를 바탕으로 미국과 무제한 통화 스와프를 체결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원화를 팔아 달러를 외환시장에서 대거 조달할 경우 원화 환율이 치솟는 등 금융 위기가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설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 원화를 달러와 맞바꾸는 통화 스와프를 제안했으나 미국은 부정적인 입장으로 알려졌다.
3500억달러라는 투자 규모뿐 아니라 투자처 결정, 수익 분배 구조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미국은 한국이 투자한 돈으로 어떤 프로젝트에 얼마를 언제 투자할지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하지만, 통상 전문가들은 “돈은 우리가 다 내고, 미국이 투자금을 마음대로 갖다 쓰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 인터뷰에서 미국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내가 동의하면 탄핵당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계속 거절하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쌀·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추가 개방은 없다고 못 박은 상황에서 대미 투자 외에 우리가 미국에 제시할 추가 카드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협상이 진전되지 않을 경우 상호 관세나 자동차 관세가 25%보다 더 높게 매겨지거나, 비관세 장벽 및 안보 이슈로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은 관세 협상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을 유사한 체급의 국가로 취급하고 있어 일본에 비해 더 나은 조건을 얻어내기 쉽지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면서도 “협상이 조금 길어지더라도 유럽연합·대만 등의 대응을 살피면서 통화 스와프 등 우리 거시 경제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할 안전 장치를 최대한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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