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에서 주방까지...뉴질랜드에서 도서관은 놀러가는 곳
제주는 '섬'이다. 그래서 지속 가능성을 얘기할 때는 늘 개발과 보존을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섬나라 뉴질랜드는 산악, 호수, 해안선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환경과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등 제주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김소은 THE 관광연구소 대표가 안식년으로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관광 1번지'를 지향하는 제주가 참고할 만한 뉴질랜드의 사례를 가지고 독자들과 비정기적으로 만난다. [편집자 글]
해외 도시를 걷다 보면, 책이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생활의 한 장면이 되는 모습을 자주 만난다. 도서관 앞 벤치에서, 공원 잔디 위에서, 사람들은 휴대폰 대신 책을 들고 시간을 보낸다. 뉴질랜드에 도착했을 때도 그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발길이 향한 곳이 도서관이었다.
가장 자주 찾는 타카푸나 도서관은 150년 전 처음 문을 열었고, 36년 전 새 건물을 지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건물은 제법 낡고 규모도 아담하지만, 속은 알뜰히 채워져 있다. 1층의 열린 공간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자주 열리며 어린이 책, 각종 잡지와 신문, 큰 활자 책들이 중심을 이룬다. 2층에는 열람실과 작은 모임을 위한 공간, 분야별 서가가 자리하고 있어 규모가 크지 않아도 이용에 불편이 없다. 생활 반경의 도서관 다섯 곳을 둘러보니, 도심 도서관은 규모와 장서가 풍부했고, 마을 가까이에 있는 도서관은 생활과 여가 중심의 공간으로 뚜렷이 구분됐다.
책을 넘기는 손끝이 사회를 잇는다
도서관은 지역 커뮤니티의 중심이다. 어르신들을 위한 담소 모임, 엄마들의 사교 모임뿐만 아니라 저자와의 만남 등 도서관의 전형적인 프로그램이 열린다. 마오리와 파시피카 문화를 보전하는 행사와 언어 보존 프로그램, 이민자·난민을 위한 환영 모임, 영어 학습을 돕는 ESOL(English for Speakers of Other Languages) 클래스도 운영된다. 오래된 시설이지만 직원과 자원봉사자가 충분해 소규모이면서도 알찬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기타 자전거 도로 지도와 생활 안내 브로셔가 곳곳에 놓여 있어 생활 안내소의 역할도 톡톡히 한다.

또 하나 눈길을 끈 곳은 정부 보고서 코너였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연차보고서, 예산 집행 내역, 분야별 기본계획이 원본이나 제본 형태로 서가에 놓여 있고, 도서관 운영보고서와 공공기관 운영평가 자료도 함께 비치되어 있다.

이곳 도서관의 편리한 점 또 하나는 대출한 책을 다른 도서관에 반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디서 가져왔든 반납은 아무 곳에나'(You can return items to any of our libraries no matter where you picked them up)라는 안내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책 읽고 반납하는 부담을 크게 덜어준다.
도서관 건축, 일상의 전망대가 되다
새로 지어진 도서관들은 건축 자체가 하나의 풍경이자 쉼터가 되어 가고 있다. 데본포트 도서관은 약 1060m² 규모로 지상과 중이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린이 공간, 청소년 공간, 조용한 공부방 등이 갖춰져 있다. 공원과 접하는 외부 독서 마당이 건물을 공원으로 자연스럽게 확장시키고, 나무 소재와 자연 채광, 자연 환기 시스템 같은 지속가능한 설계 요소들이 공간에 온기를 더한다.
버켄헤드 도서관은 "고전적인 나무" 사이로 시선을 열어주는 설계가 핵심이다. 수직의 목재 베턴(batten)이 파사드를 감싸고, 창문 너머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디자인은 낮에는 자연광이 내부 깊숙이 스며드는 분위기를 만들고, 밤에는 외부에서 내부의 따뜻한 빛이 유리창을 통해 은은하게 새어 나온다. 내부의 가로창은 해안 쪽으로 랑기토토 섬, 도심 쪽으로는 오클랜드 중심지의 마천루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역할도 한다.
이러한 건축적 배려는 미적 가치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용자들은 잠시 쉬며 읽고 싶을 때, 사진을 찍고 싶을 때도 이곳을 찾는다. 단순히 "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 "머무르고 싶게 만드는 풍경의 장"으로서 도서관이 새롭게 자리 잡고 있다.
책을 넘어 제3의 생활공간이 되다
뉴질랜드 도서관은 생활의 긴장과 업무에서 벗어나 누구나 편안히 머무르며 대화와 휴식이 가능한 제3의 장소(Third Place)로서의 역할을 넓혀가고 있다. 열람실과 카페의 경계를 허문 공간이 늘어나면서, 책을 읽다가 커피와 빵을 즐기며 머물 수 있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있다. 오클랜드 중앙도서관의 허니 카페(Honey Café)처럼 건물 내부에 자리 잡은 카페는 도서관의 출입구 역할까지 겸하며, 머물며 대화하거나 간단히 일할 수 있는 열린 거실로 기능한다.

경계 없는 도서관, 누구나 머무는 곳
이곳 도서관에서 가장 생각이 깊어진 순간은 노숙인들의 존재였다. 큰 짐을 끌고 와 소파에서 쉬거나 잠을 청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때로는 불쾌한 냄새가 풍기기도 하지만, 누구 하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직원이 내쫓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 도서관은 지역 복지 단체와 협력해 상담, 식사, 샤워 정보를 안내하는 등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한다고 한다. 공공의 문을 닫지 않는 포용의 철학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한국의 도서관이 주로 회원제 대출과 개인 학습 공간에 무게를 둬 조용한 공간이라면, 이곳은 커뮤니티와 문화·환경 프로그램을 품은 열린 공간으로 항상 사람들이 북적인다. 낡고, 작은 건물에서도 활발히 열리는 마오리와 파시피카 문화 프로그램, 이민자와 난민을 위한 환영 모임, 씨앗을 나누는 서랍이나 정부 보고서 비치 공간, 카페와 예술 전시를 품은 제3의 장소까지—이 모든 것은 책 한 권을 빌리는 행위를 넘어 일상의 교류와 시민 참여가 살아 있는 무대를 보여준다.
이런 경험을 곱씹다 보니 도서관이 곧 민주주의와 지속가능성을 품은 생활 플랫폼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씨앗을 나누며 작은 생태 순환을 일구는 서랍,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직접 확인하는 시민의 눈길, 누구나 들어와 쉴 수 있도록 활짝 열린 문, 여행자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찾는 공간까지—이 모든 것이 투명한 행정, 지속가능성, 사회적 포용을 실천하는 살아 있는 현장이었다.

김소은
제주에서 10여년을 살다 뉴질랜드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지속가능한 관광, 생태관광, 람사르습지 보전, 해양관광 자원 발굴 등과 관련한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해 왔으며, 제로웨이스트샵을 운영한 경험이 있다. 대학때부터 관광경영학을 전공하였으며, 석박사 과정에서 관광경제, 마케팅, 관광객 행동 등과 관련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현) THE(Think for Human & Earth) 관광연구소 대표, 섬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