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목포 개항, 근대교육의 교문 목포북교초등학교 (하-2) [문화발원지 남도 학교기행]

선명완 2025. 9. 1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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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김우진, 김방한 3대의 거처였던 성취원 자리에 들어선 북교동성당

#근대 문화의 발원지, 북교동

목포 근대 문화의 발원지는 쌍교촌, 북교동이었노라고 규정하고 싶다. 근대의 골목 골목마다에서 새로운 문화의 지평을 열었던 이들이 유달리 많이 나고, 성장하고, 활동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북교동 문화의 원형, 참샘은 무엇이었을까. 교육의 터전, 학교였을까?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 아마도 사람이었을 것이다. 우월한 문화적 소양을 지닌 낱낱의 사람, 그런 개별적인 요소가 아니라 군상이었을 것이다. 문화는 '군락의 행위'임을 함의한다. 사람이 모이면 문화는 저 스스로 태동한다. 지금은 원도심이라고, 휑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개항 이후 더 정확히는 1904년 집단 거주촌이 조성된 쌍교촌 지역, 그리고 그 주민들을 위한 근대교육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언저리라고 여겨진다.

개항 후 이 지역을 관리 감독했던 관서가 무안감리서였다. 주로 외교 및 통상 사무를 취급하였지만 민원 등 일반적인 관서 업무도 맡았다. 당시 목포는 무안에 속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관서의 명칭이 무안감리서였던 것인데, 을사조약 이후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1906년 10월 폐지되었다.

무안감리서 제6대 감리가 김성규(1903~1904 재임)였다. 폐지되기까지 10명의 감리들은 대체로 민족적이고 자주적 차원에서 업무를 처리하였지만 김성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개인 문집(『초정집』)을 낼 만큼 문학적 소양도 풍부했으며 근대 의식을 지닌 개명한 관리였다. 25세 무렵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 5개국 전권공사관의 서기관으로 홍콩에서 상당 기간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이러한 해외 체류 경력 영향으로 보인다.

목포항을 배경으로 한 자생적인 객주상 조직인 사상회사(士商會社)를 뒷바라지하며 일본의 상업 자본의 침투와 약탈 행위를 견제하려 했다. 표면상 건강 문제라고 하였지만, 이 때문에 김성규는 결국 일본 상업자본가 조직인 목포상업회의소와 이들의 뒷배였던 일본 폭력배 낭인들의 압박으로 1년 만에 감리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1930년 12월 07일 매일신보 "윤심덕이 살았다, 김우진도 살았다-이태리 로마에 꿀 같은 살림. 전후 사정에 비추어 살았을 듯 싶다." -김우진 실종 4년 후에 등장하는 이런 기사는 무엇을 의미할까.

#김우진의 형제들

3인 3색, 김성규의 세 아들이 그러했다. 그 첫째가 신극 운동의 개척자 김우진이다. 부친이 여러 관직을 거친 대지주였기에 집안 환경은 부유했다. 1897년 개항둥이로 출생한 그는 당시 공립목포보통학교를 1907년 입학하여 1910년 1회로 졸업하였다. 성취원(成趣園)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북교동성당 자리에서 김우진의 실종 1년 전에 태어난 그의 아들 김방한(1925~2001) 또한 역사비교언어학 전공자로서 고대 한국어와 몽골어 연구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서 34년간 교수로 활동하면서 언어학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인데, 한반도 내에 2개 이상의 어족이 존재하였다는 그의 이론은 매우 흥미롭다. 그의 연구 성과는 부친의 행적 등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북교동 '김우진 벽화 거리'와 '반딧불 작은 도서관'에서 김우진의 행적을 만날 수 있다. 짧은 생애였음에도 시 50편, 희곡 5편, 소설 3편, 문학평론 20편을 남겼다. 동갑내기 성악가 윤심덕(본명 윤수선)과의 현해탄 일화는 풍문으로서 근거가 명확하지 않기에 언급하지 않겠다.

김성규의 차남 김철진(목포공립보통학교 3회)도 일본에 유학하여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정치경제과를 졸업하던 해인 1927년 2월 귀국했다. 1926년 8월 형 김우진이 세상을 떠나자 가업을 잇기 위해 돌아왔던 모양이다. 귀국 후 1927년부터 곧장 목포에서 청년운동과 신간회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어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여 목포 야체이카(러시아 어로 '소조직', '세포'를 뜻하며,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작은 단위의 조직체) 책임자가 되었다. 그 여파로 1928년 체포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35년 최초의 종합 시사 평론지는 「호남평론」을 창간하였지만, 1930년대 중반 이후로는 급격한 사상적 전향이 있었던지 목포부회, 전남도회 의원을 지내면서 친일적 활동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목포신보」를 인수하여 「목포일보」로 사명을 바꾸어 운영하였으며, 목포상과대학 2대 학장을 맡기도 했다.

일본 유학을 경험한 첫째, 둘째가 자유연애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에 마뜩잖았던 김성규는 셋째 김익진(목포공립보통학교 9회)을 중국으로 보냈다. 베이징대학에 가서 언어학 공부를 했는데, 부친의 기대와는 달리 그 역시 베이징대학에서 유행하던 무정부주의를 배워 돌아왔다. 언어학을 전공하였고 6개 언어를 할 정도 언어 감수성이 유달리 풍부했던 그는 목포에 돌아온 뒤 에스페란토(Esperanto)어 강습회를 열면서 이를 널리 퍼뜨리고자 하였다.

이 언어를 창안한 이는 폴란드 안과의사 자멘호프(Ludoviko Lazaro Zamenhof, 1859~1917)이다. 김익진은 어인 연유로 이 낯선 에스페란토어를 전파하고자 했을까. 에스페란토어가 창안된 것은 러시아 지배 상태의 폴란드, 그곳에서는 러시아인, 독일인, 폴란드인, 유대인 사이에 갈등과 불평등이 만연하고 있었다. 자민족의 언어 때문이었다. 배우기 쉽고 중립적인 언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언어 또한 차별과 갈등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 자유와 평등을 애써 추구해왔던 김익진이었기에 에스페란토어를 소개했을 거라는, 그런 추론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그 역시도 역시 일제 경찰의 주목 대상이 되었고, 이는 부친 김성규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1937년 무렵부터는 천주교에 귀의하여 수도자로서 삶을 살았다. 광주교구에서 활동하다가 1940년 장성으로 이주하여 자비로 장성성당을 세우기도 했다. 해방을 맞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토지를 목포와 장성 일대 소작인에게 분배한 일화는 유명하거니와, 나머지 재산도 광주교구에 헌납하고 말았다. 가족들의 삶이야 궁핍하였겠지만 부인마저도 뜻을 함께 하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자신의 본향인 안동 근처로 이주하여 천주교 계열 학교인 왜관 순심중학교, 김천 성의중학교, 그리고 경주 근화여자중학교에서 교감으로 근무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주로 경북지역에서 머물면서 문필활동에 전념하여 번역 활동과 저술 활동을 하였다. 그의 세례명이 '프란치스코'이기도 하지만 나눔의 실천과 담박한 삶으로 보아 사람들은 그를 '영혼의 놀이터',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로 부른다.
 
김현의 거리 입구 그의 거처로 추정되는 건물(좌)

이 밖에도 북교동 살이를 했거나 북교초등학교를 거쳐 간 인물들을 이루 다 언급할 수가 없다. 일반에 알려진 인물 중심으로 간략히 묶어서 소개하고 한다.

초창기 인물로는 가수 남진(김남진)의 부친이자 미곡상, 정미업 등 기업활동과 정치 활동에 이어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던 김문옥(1회), 『백화(白花)』(1932)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여성 최초로 장편소설이라는 장르에 도전한 박화성(6회), 외과 전문의 제1호 면허를 취득하였으며, 국립 소록도병원장을 지낸, 차범석의 숙부이기도 한 차남수(9회), 1934년 '불사조'를 시작으로 목포인들의 애환과 사랑을 노래한 '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1923년 입학, 4학년 학업 중단), 뒤에 자세하게 소개하겠지만, 교사이자 극작가인 차범석(28회)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신안 하의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 4학년으로 전입하여 이 학교를 졸업(30회)하였으며, 전 국회의원 임종기(30회), 무형문화재 살풀이 이매방(대련 정포소학교에서 전입 1939년 30회 졸업)도 같은 해에 졸업하였다.

전 국회의원 권노갑(33회), 전 헌법재판관 조승형(38회) 등도 이 학교 졸업생이었다. 한국 문단에서 문학평론이라는 장르를 구축한 김현(진도에서 1학년 1학기 후 전학, 44회), 가수 남진(본명 김남진, 49회), 전 전라남도지사 박준영(49회), 전 국회의원 류선호(57회) 등도 이 학교를 거쳤다.

1991년 노태우 정권에 항거하다 분신한 '겨레의 딸 자주의 불꽃' 박승희(1971~1991) 열사 또한 북교초등학교 학생이었으며, 1년 아래로 진도 출신이지만 '전원일기' 등에 출연했던 배우 겸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조하나도 이 학교 동문이다.
 
차범석 작은 도서관.

#연극, 휴가를 얻는 일

차범석의 첫 직업은 교사였으니, 그것도 자신의 모교 목포북교국민학교였으니 그의 얘기를 좀 더 하려고 한다.

어려서 이름은 평균(平均)이었단다. '평균치만 되어라', 풋웃음이 나는 이름이다. 중학 입학을 앞두고 범석(凡錫)으로 개명했다는데, 집안 어른들의 작명 솜씨도 솔찬하거니와 개명 의도도 경이롭다. '무릇 잘 어울리거라'라는 뜻 아닌가. 집안에서는 의대 진학을 권유할 만큼 완고하였다는데, 작명 취지와 생애 진로가 이다지도 달랐을까.

1944년 일본군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그는 1년 과정의 광주사범학교에 진학하였다. 졸업 직후 1945년 3월 목포북교국민학교에 첫 출근하였다. 현직 교사였지만 그는 5월 13일 일본군에 징집되어 제주도에서 복무를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곧장 목포북교국민학교로 복직하게 된 그는 자신이 맡은 학급의 급훈을 '자유'라고 내걸었다고 한다. 몹시도, 간절히, 자유가 그리웠던 것일까. 10년도 지난 일이지만, 내가 교장으로 부임한 해에 학교 교훈을 이전 '성실'에서 '자유'로 개정한 바 있어 그 심사를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1937년 무렵, 아직 10대 중반이었던 차범석은 목포 평화극장에서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관람한 후로 공연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참 이른 진로 선택이었다. 태평양전쟁 이전까지 약 2년간 일본 유학을 하던 중에도 영화나 연극 등 공연예술에 흠뻑 빠져 살았던 그였다. 이러한 내면의 지향 때문에 1946년 9월 교직을 중단하고 본격 공부를 위해 4년제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 문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연희대학교에서 만난 스승들은 그에게 보배로운 존재들이었다. 시인 김기림, T.S. Eliot의 전문가 이인수, 소설가 염상섭과 이무영, 그리고 선택과목으로 들었던 유치진의 '희곡론' 강의는 그에게 절대적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어 문학평론가 김동석, 영문학자 설정식, 문학평론가 최재서, 셰익스피어학 권위자 권중휘, 영문학자 이호근 등이 그들이었다. 아울러 자신이 조직한 '연희극예술회'라는 동아리 동료들(최창봉, 김경옥, 조동화, 김지숙, 조성하, 박현숙 등)과의 활동은 본격적인 희곡 창작과 연극 운동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4학년 때 전쟁을 피해 학업을 중단하고 목포로 돌아온 그는 목포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교사로는 영문학자 이가형, 사학자 양병우, 위에서 언급했던 김우진의 아들 언어학자 김방한 등이었고, 학생으로 차인석, 최종수, 최인훈, 박화성의 아들 천승세, 김은국, 최영철, 강대진, 김성옥과 문학 평론가 김현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약 5년 동안 교직생활 속에서도 지속적인 희곡 습작과 학교 또는 지역에서 연출 활동을 하였다. 때로는 본인이 직접 연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습작과 무대 연출 경험은 신춘문예 등단의 발판이 되었다. 1955년 단막극 <밀주>로 가작 입선에 이어 1956년에는 <귀향>이 당선된 것이다.

1955년 12월 12일 목포중학교 비리를 비판한 사건으로 학교를 그만둔 그는 56년 봄 <귀향>을 계기로 서울 덕성여고로 근무지를 옮겼다. 소설가 박화성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국내 최초로 동인들이 모여 이룬 극단 '제작극회' 창단(1957년)과 소극장 운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4.19 직후 덕성여고마저 그만두었다. 그의 정치적 소신이 작용하였다.

1963년 극단 '산하'를 창단하면서 전문 연출가로서 현대극을 정착시켰을 뿐 아니라 연극의 대중화에 기여한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1980년대 가히 국민 드라마라고 할 수 있었던 <전원일기>의 초기 배경과 등장 인물의 설정 등 극본도 그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로는 연극에 전념하기 위해 드라마 작업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작품 내용을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그의 주요 작품 몇 개를 골라 평론가들의 의견을 토대로 소개하려고 한다. 그의 생애는 일제의 강점과 징집, 해방과 전쟁, 분단과 산업화라는 한국 근현대사 위에 있다. 역사적 자각과 사실주의적 입장에서 희곡을 창작하고 연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작품과 무대는 시대를 관통한 것이다.

초기 <불모지>(1957), <나는 살아야 한다>(1959),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1960) 등은 해방 이후 혼란한 시대상과 신구세대의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평이다. 대표작 <산불>(1962)은 민족 분단과 이념 갈등을 과부촌이라는 공간을 통해 묘사한 것으로, 사실주의 극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등장 인물들을 통해 전쟁과 이념이 개인의 삶에 남긴 상흔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작품은 오페라, 창극,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로 각색되며 꾸준히 오래도록 재공연되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1974), <손탁 호텔>(1977), <식민지의 아침>(1986), <나는 불섬으로 간다>(1997), <옥단어!>(2003) 등은 역사극으로 분류된다. 동학혁명, 일제강점기, 학생운동, 독립운동가의 삶 등 근대의 사실들을 조명했다. 이외에도 <열대어>(1966), <장미의 성>(1968), <환상여행>(1971) 등에서는 산업화 시대 개인의 내면 심리, 도시화, 성애, 소외 문제 등을 다루며 리얼리즘의 범위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요즘 교육 현장에서는 '연극을 통한 활동 수업'이라든지 '희곡 작성법'과 같은 확장된 수업 모형을 만나기 어렵다. 외부 전문가들이 치유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참여형 연극'을 더러 보았으나 어색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차범석 그에게는 '희곡을 쓰는 일은 휴가를 얻는 일'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차범석을 고대한다.
 
1948년 1월 18일 '신촌' 목포 공연. 차범석은 연출과 주연을 맡았다. 1951년 3월 1일 '별은 밤마다' 목포 공연. 이 작품이 실질적인 데뷔작으로 극작, 연출, 주연을 모두 맡았다.

#목포 문학마을 조성

지난 3월의 소식에 의하면 '목포 문학마을'이 조성될 것이라고 한다. 근현대 문학 자산을 관광 자원으로 연계하겠다는 것인데, 약 145억 원을 투입하여 2027년 완료할 것이라고 한다.

대상지는 의당 북교동을 비롯한 목원동 일대이다. 원도심이라고 하는, 근대 문화의 발원지이다. 마을 곳곳 골목마다 문학과 예술의 자취가 넘치는 곳이다. 작가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인들이 태어나 창작 활동을 했던 곳 아닌가.

현재 갓바위문화타운 목포문학관에는 김우진(극작가), 박화성(소설가), 차범석(극작가), 김현(문학평론가) 등이 같은 건물 내에 개별적 형태로 문학관이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유기적으로 재구성하여 아예 문학마을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김지하(시인), 최하림(시인), 천승세(소설가), 황현산(문학평론가) 등 목포 출신 작가들의 공간도 추가로 마련할 모양이다. 한 지역에서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문학인들이 배출한 것도 이례적인 경우이거니와 지역을 통째로 문학마을로 조성한 사례도 드물 것이다.

일을 추진하기에 앞서 행정 효율과 편리만을 앞세우지는 말기 바란다. 도시 설계, 근대 건축, 지역사, 관련 문학인 등 전문가들의 고증과 의견을 충실히 듣기 바란다. 바라기는, 안데르센의 고향 덴마크 오덴세처럼 명품 동화마을, 그에 버금가는 문학동네가 꾸려지길 간절히 기원한다. 목포의 문화가 북교동에서 다시 피어나리라고 꿈꾸고 기대한다.

목포의 근대 문화 그 중심에 학교가 있었다. 현재 목포북교초등학교 학생은 학년당 10명 안팎, 모두 70명 정도이다. 저학년일수록 입학생이 줄어 1, 2학년 학생은 한 자리 숫자이다.

여름 내내 목포 북교동 근처를 둘레둘레 하였다. 개항장 주변 근대 거리에서 서성거렸다. 살갗은 사과빛이지만 심정은 홍로맛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제 서글서글한 산들바람을 만나고 싶다. 해발 고도가 400m~600m, 평균 500m 지점이라면 가을을 느낄 수 있을까. 그래, 화순 이서로 떠날 참이다.

선명완 담쟁이대안교육연구소장
선명완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