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숙적의 덫…남북 군사합의는 왜 실패했나 [박수찬의 軍]
숙적 관계. 오랜 시간 지속되는 적대적·경쟁적 관계를 뜻하는 단어다.
국제 정치에서는 장기간에 걸친 국가간 갈등과 경쟁을 설명하는 숙적 관계 이론으로도 불린다. 이 이론만큼 한반도 정세를 잘 설명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남북 관계는 타협과 불신, 일시적 긴장 완화와 충돌이 이어졌다. 군사적 대치와 심리적 적대가 겹치면서 구조적 긴장관계는 강도를 더해갔다.

2018년 9월 19일 남북이 맺은 9·19 군사합의도 마찬가지였다. 시행 초반부터 삐걱거리다 2023년 말 북한의 파기 선언, 지난해 6월 우리측의 효력 정지 결정으로 사문화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군사합의 복원을 공약했다.
하지만 정치적 이벤트로는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앞세우며 매몰차게 돌아선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70여년에 걸친 적대와 대립, 갈등이 쌓이고 쌓여 숙적처럼 되어버린 남북관계는 단순한 협정 체결 또는 복원이나 정치적 이벤트로는 돌이킬 수 없다.
군사합의 체결 7년이 흐른 지금, 복원을 섣불리 추진하기에 앞서 북한의 대남 적대 인식을 깰 전략과 갈등관리 메커니즘을 만들고 실천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9.19 남북 군사합의는 비무장지대(DMZ)와 북방한계선(NLL)을 비롯한 남북 접경 지역에서의 적대행위를 종식해 우발적 충돌 위험을 제거한다는 게 핵심이다.
남북한 군대는 1953년 정전협정 이래로 DMZ·NLL에서 대치하며 숱하게 충돌해왔다. 휴전선에선 북한의 무력 도발과 남한의 대응이 반복됐고, NLL에선 남북 군함들이 교전을 벌였다. 판문점에서 열린 대화는 날선 공방의 연속이었다.
군사합의는 이같은 충돌을 막고자 등장한 카드였다.
거듭되는 충돌을 멈추기 위해 남북한 군대를 휴전선과 NLL을 중심으로 일정 거리에 걸쳐 완충구역을 만들어 분리·격리시키고, 훈련과 배치 등 군대의 운용을 제한하도록 했다.
양측이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밀도가 낮아지면 휴전선 일대에서의 우발적 충돌과 전쟁 가능성은 감소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볼 때, 군사합의는 한반도 긴장완화의 촉매제로서 궁극적으론 남북 평화공존에 기여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론이 현실 세계에서 그대로 작동한다는 보장은 없는 법.
체결 7년째인 지금, 휴전선에선 정전협정 체제를 따른다. 군사합의에 따라 철거된 DMZ 내 감시초소(GP)도 복원됐다.
왜 이런 결과를 초래했을까. 군비통제는 신뢰구축과 군사적 제한 조치, 군비축소로 구성된다.
냉전 시절 미국, 유럽, 옛소련은 상호 훈련 참관과 대화를 통해 서서히, 꾸준히 접촉을 이어가면서 신뢰를 쌓았다.
남북은 군사 분야에서 신뢰를 쌓을 계기가 거의 없었다.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에 군사공동위원회 설치가 포함됐으나, 실제로 열리진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무력충돌을 지속하면서 불신이 누적됐다.
이를 일부나마 해소하려면 연속적이고도 정례적인 대화와 접촉, 상호 검증 및 확인 체계가 필수다.

이것이 바로 숙적관계 이론에서 적대적 두 국가가 갈등을 종결하는 과정 중 최종 단계인 호혜성 증대와 제도화다.
그런데 군사합의는 체결 이후 연속적·정례적 상호 대화와 접촉이 부진했다.
명확하고도 체계적인 상호 검증 및 확인을 맡을 남북 공동검증위원회 구성 등의 조치 없이 군사적 제한조치 이행을 당사자의 의지에 맡겼다.
이행 및 검증 장치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은 군사합의가 언제든 무력화될 수 있는 상태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북한은 군사공동위원회 설치·운영에 합의하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단발적인 정치 선언이나 협상만으로 70여년에 걸친 숙적 관계에 놓인 남북의 적대와 갈등, 불신을 온전하게 풀어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셈이다.
◆광범위한 정책적 대응 필수
군사합의 복원을 대선 공약으로 했던 이재명 정부는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및 철거 등을 통해 남북간 우발적 충돌 방지와 긴장 완화를 꾀하고 있다.
군 당국도 이에 호응하는 모양새다.
진영승 합참의장 후보자는 최근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강대식 의원에 제출한 인사청문회 서면 답변에서 군사합의 복원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해 군사대비태세에 영향이 없는 범위 내에서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가 필요하다”며 “정부의 정책적 결정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군의 역할”이라고 밝혔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도 7월 15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군사합의는) 바로 복원되는 문제가 아니므로 낮은 단계부터 서서히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군사합의는 2018년 탄생한 판문점 선언의 부속 문서 형태다. ‘민족’과 ‘통일’에 초점을 맞춘 판문점 선언과 그 부속 문서에 북한이 관심을 돌릴 가능성은 높지 않다.
북한이 러시아, 중국과의 밀착으로 글로벌 플레이어의 지위에 오른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하지만 군사합의 복원 여부와는 별도로 한반도 내 우발적 충돌 방지와 긴장 완화를 위한 노력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1·12일 국방과학원 장갑방어무기연구소와 전자무기연구소를 현지지도하면서 내년 개최될 제9차 당대회에서 핵무력과 상용무력(재래식 무기) 병진정책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핵무기와 탄도미사일로 전략적 억제력을 갖춘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으로 쌓은 현대전 경험을 통해 재래식 전력을 현대화, 전쟁 수행 능력을 높이려는 의도다.
북한이 전략적 억제력과 전쟁 수행 능력을 모두 현대화한다면, 한국을 상대로 군사적 위협이나 도발을 더욱 적극적으로 감행할 위험이 커진다.
북한의 군사력 사용 가능성을 낮추고, 핵전력과 재래식 전력의 연계를 차단하려면 한반도 내 군사적 대치 국면을 완화해야 한다. 군사합의와 유사한 형태의 제도적 군비통제 장치를 만들 필요가 있는 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결, 미·중 전략 경쟁 양상, 대내 경제정책 등 국내·외 변수가 불거지고 확산할 때,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 관계의 비효율성과 군사적 긴장완화의 필요성을 느낄 가능성이 있다.
이같은 국면이 전개되는 것에 대비해 반복적인 행동과 접촉을 통해 신뢰를 구축, 상호 협력에 대한 기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방안들을 사전에 마련해야 한다. 북한의 행동에 대한 인센티브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신뢰와 협력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이를 제도화해서 적대 관계를 어느 정도나마 완화하는 방향으로 북한을 유도해야 한다.
남북 공동검증위원회나 군사공동위원회처럼 상호 합의를 이행·검증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이를 제대로 가동하도록 하는 강제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인간 관계나 국가간 관계에서 가장 배신당하기 쉬운 것이 선의다. 처음에는 선의를 갖고 약속을 해도, 나중엔 자신과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남북 관계가 예전보다 더욱 악화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약간의 신뢰마저 깨진 지금, 군사합의를 포함한 기존 남북 합의의 복원은 한계가 있다.

어느날 갑작스레 찾아올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선 지금부터 이를 위한 범정부적 준비와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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