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서린 아빠의 눈, 그날의 상처 딛고...새순처럼 피어난 세 모녀

김동욱 2025. 9. 19.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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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살해 후 자살: 비극을 기록하다]
<5> 상처를 넘어선 삶
한순간의 폭력, 남겨진 가족의 긴 싸움
서로의 어깨에 기대며 겨우 버틴 세 모녀
"결국 우릴 살린 건 책임감과 사랑"
편집자주
부모에게 자녀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 그래서 동반자살이 아니라 '자녀 살해 후 자살'이다. 매달 3건가량 꾸준히 벌어지는 이 비극은 특정 가족의 불행이 결코 아니다. 경제·사회적 고립과 절망, 구조하지 못한 사회의 실패다. 5회에 걸쳐 외면해서는 안 될 이 비극의 현실을 추적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인공지능이 그린 수빈씨 가족 모습. 그래픽=김동욱 기자·미드저니

'우리 모녀 셋이 서로에게 전우가, 힘이 되어 준 시간이었지.'

벌써 11년이 지났다. 남편이 휘두른 흉기 자국은 여전히 집 한구석에 남아 있다. "진작 문을 바꿔 달아야 했는데…" 무심히 미루며 세월은 지났고, 자국은 닳아 매끈해졌다. 희미해진 만큼 상처도 옅어졌을까 싶지만, 수빈씨는 여전히 그때 쓰린 기억을 떠올린다.


말 없는 남편

가족은 평범했다. 부부는 열심히 일했고, 두 딸을 잘 키우고 싶어 했다. 남편은 대기업 협력업체에서 묵묵히 일만 했다. 집과 직장밖에 모르는 듯, 성실함으로 세상을 버텼다.

그는 집에서 특히 말이 없었다. 고된 업무 때문인지, 타고난 성격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딸들이 문을 열고 반겨도, 고맙다며 안아주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중학생이 된 뒤 딸들에게 휴대폰이 생겼지만 아빠와 주고받은 문자는 손에 꼽았다. 남편은 성실하고 바른 사람이었지만 가족에게는 무뚝뚝했다. 대화가 부족했고, 각자의 방문은 굳게 닫혀 갔다.

수빈씨는 남편이 심하게 억눌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오랫동안 한 직장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대우는 그에 한참 못 미쳤다. 대기업이 성과급 잔치를 벌인다는 뉴스에도, 협력업체에 있는 남편에게까지 혜택이 내려오진 않았다. 남편의 낙은 퇴근 뒤 마시는 반주 한 잔. 한 달 두 번 쉬는 날을 빼면 늘 그랬다.

시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맏아들 역할에 최선을 다했지만, 시댁은 그 노력을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남편이 한번은 어릴 적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마당에 장미꽃을 심어 예쁘게 가꿨는데, 아버지가 "남자가 무슨 꽃놀이냐"며 모두 뽑아버렸다고 했다. 남편은 그 상처를 영 지우지 못하는 눈치였다.


트리거

시간이 갈수록 남편은 스스로를 더 고립시켰다.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기운을 내뿜었다. 가족에게도 점점 차갑게 굴었다. 딸들과 식탁에 마주 앉을 때면 "부모님 모시러 아빠는 떠날 거야"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말이 반복되고, 딸들의 반감은 커졌다. 수빈씨 눈에 남편은 부모에게 떼쓰는 열 살 소년처럼 보였다. 성장하지 못한 자아가 끊임없이 분란을 일으키는 듯했다.

남편의 내면은 이미 금이 가 있었다. 그러나 생계와 두 딸 돌보기에 지쳐, 남편을 살필 여력은 없었다. 수빈씨 역시 탈진 직전이었다. 가정은 위기에 빠졌지만, 손 내밀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렵게 마음을 털어놓아도 "우리 남편도 그래요"라는 말뿐이었다. 어쩌면 남편은 그때 이미 치료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입 밖에 꺼낼 용기는 없었다.

어느 날, 남편은 집에서 편지 한 장을 마주했다. "힘들어요. 우릴 힘들게 하는 건 가족이 아니에요. 맨날 떠난다고 하셨으니, 아빠가 집을 떠나세요."눌러 담긴 글씨엔 서운함과 상처가 배어 있었다. 수빈씨는 참았지만, 딸들은 그러지 못했다.

결국 그는 폭발했다. 서운함과 배신감에 휘청거리는 듯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달이 났다. 술에 잔뜩 취한 남편은 작업복도 벗지 않은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평소엔 잘 켜지도 않던 오디오를 틀었다. 갑자기 울려 퍼진 음악이 소음처럼 집 안을 뒤덮었다.

쿵쿵 울리는 소리에 방을 나온 아이들은 잠시 멈춰 아빠를 바라봤다. 아이들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그 표정 때문이었을까. 남편이 주방으로 달려갔다. 손에는 아이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물건이 들려 있었다. "내가 너희를 낳았다. 너희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남편의 고함이 집 안을 흔들었다.

이성을 잃은 아빠를 큰딸이 몸으로 막아섰다. 몸싸움이 벌어졌고, 마침 집에 들어선 수빈씨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미 큰딸의 목에는 깊은 상처가 났다. 뒤엉킨 순간, 이번엔 수빈씨의 손을 칼날이 스쳤다. 긴급히 병원으로 옮겨진 덕분에 딸은 생명을 건졌다.

수빈씨는 자주 떠올린다. 편지를 읽던 순간 분노 대신 귀 기울였다면, 다음 날 치킨 한 마리 사들고 와 "아빠가 그간 너무 무심했지" 하고 웃으며 다독였다면…지금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빠의 증발

법원은 남편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무심했을 뿐 아이들에게 손을 댄 적은 없다는 점을 참작했다. 남편은 법정에서 죄를 뉘우치고도, 아이들에게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당연히 아이들도 아빠를 용서하지 못했다.

처벌이 끝이 아니었다. 수빈씨에겐 남겨진 가족을 지키는 일이 중요했다. 상처 입은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생계를 꾸려야 했다. 은행 빚은 여전히 남았고, 이사조차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사고가 난 다음 날에도 붕대 감은 손으로 일을 나가야 했다.

수빈씨는 일부러 딸들 심리치료를 위해 다른 지역 병원을 찾았다.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이 무서웠다. 경찰에도 절대 언론에 내용을 알리지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도 불안했다. "아무리 애써도 그날 기억이 얼룩으로 번져 아이들 마음속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으면, 그땐 어떡하지."

혼자 다 감당해야 했다. 너무 힘겨웠다. 끔찍한 일을 겪고도, 그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마침 사건 직후, 딸의 가장 친한 친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공익을 위해 일하다 숨진 죽음 앞에 지역은 깊은 애도에 잠겼다. 수빈씨는 딸 손을 잡고 빈소를 찾았다. 딸은 울며 친구를 끌어안았고, 수빈씨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날 너무 힘들었어, 엄마. 아빠가 사라진 건 똑같은데, 왜 난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걸까…나 정말 외톨이가 된 것 같았어." 딸의 고백은 수빈씨의 마음을 깊이 후벼 팠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버거운 공간이었다. 몸은 약했고, 밤마다 악몽이 짓눌렀다. 출소한 아빠가 찾아와 복수하는 꿈에 시달리곤 했다. 큰딸은 한여름에도 목까지 옷깃을 세웠다. 흉터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결국 아이는 학교를 포기했다.


엄마의 결단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불안에 떨며 평생을 살게 될 게 뻔했다. 아이들 몰래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과 우리 사이엔 풀어야 할 문제가 있어. 내가 찾아갈게요."

며칠 뒤, 수감된 남편을 찾았다. 그는 거기서도 성실했다. 심지어 모범수였다. 예전과 달리 눈빛도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잘 지냈어? 당신이 원하면 거기서도 내가 친구가 돼 줄게. 시도 써 보내고, 그림도 그려서 보내줄게."

수빈씨는 한 달에 두어 번 남편을 찾아갔다. 영치금을 넣어주고, 겨울이면 털옷까지 챙겼다. 그와의 앙금을 풀어야 했다. 그것만이 아이들을 다시 해치지 않을 길이라고 믿었다. 법무부에서 "모범수라 6개월 일찍 가석방하려 한다, 괜찮으시겠냐"고 물어왔을 때도 수빈씨는 "네"라고 답했다.

남편이 나온 뒤 마지막 전화 통화를 했다. 그게 끝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길로 갔다. 남편은 끝내 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다.


"너희 잘못은 없어"

세 모녀가 고양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삽화=신동준 기자

아이들은 성인이 된 뒤에도 이따금씩 흔들렸다. 공황이 찾아와 깊은 어둠 속에 빠져 자해로 이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수빈씨는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엄마는 어디도 도망가지 않아. 너희 잘못은 하나도 없어. 괜찮아. 울어도 돼. 엄마는 항상 너희 옆에 있을 거야."

면도날 위를 걷듯, 아슬아슬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세 모녀는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버텨냈다. 사고 이후 큰딸은 고양이 한 마리를 입양했고, 작은딸도 아르바이트 중 사경을 헤매는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왔다. 반려묘는 어느새 가족이자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됐다.

"돌아보니, 결국 우리를 살린 건 책임감과 사랑이었어요."

두 딸은 이제 엄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작은딸은 최근 대학원에 합격해 해외에서 인턴을 할 기회를 얻었다. 큰딸도 열심히 일하고 사랑하며 평범하지만 행복한 청춘을 보내고 있다.

초여름 햇살이 쨍쨍한 어느 날, 수빈씨는 딸들을 태우고 집 근처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그때 작은딸이 말했다. "엄마, 아빠 찾아간 거 우리도 알아. 더 애쓰지 마. 엄마는 충분히 할 만큼 했어."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무겁던 여름 공기가 한없이 경쾌하게 느껴졌다. 겨울을 지나 봄에 새순이 돋듯이, 아이들 얼굴도 싱그럽게 빛나고 있다. 수빈씨 눈에 분명 그리 보였다.

저마다의 속도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래픽=김동욱 기자·미드저니
◆엑설런스랩 기획유닛팀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범죄 수법의 묘사를 최소화하는 대신 사건에 연루된 이들의 심리와 회복 과정에 초점을 뒀다. 사건에 관련된 가족들의 신원 보호, 피해 아동들 상당수가 미성년자라는 점 등을 감안해 등장 인물들 이름을 가명 처리했다. 물론 등장 전문가는 모두 실명이다.

팀장= 김동욱 기자
취재= 김지현·한소범 기자, 백혜진 인턴기자

<글 싣는 순서>
① 참회의 눈물
② 두 번의 버림
③ 벼랑 끝, 비극
④ 처벌과 용서 사이
⑤ 상처를 넘어선 삶

 

■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1. ① 참회의 눈물
    1. • 3건 중 1건은 아이만 죽었다...자녀 살해 후 자살 260건, 분석 결과 모두 공개합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1110300003636)
    2. • 자녀 살해, 사망 아동이 7명?...국가도 모르는 '숨은 죽음' 2배 더 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0116550005046)
    3. • 시청의 통보…자녀 살해 후 자살 가정에 "치료비 4천만 원 갚아라"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82713520005534)
    4. • 남편 잃고 7년 버틴 엄마...내가 내 아이를 죽이려 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82113370004609)
    5. • 자녀 살해 후 자살, 대체 왜? 막을 순 없었나?...기록 너머 현실을 들여다보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82817010003426)
  2. ② 두 번의 버림
    1. • 부모에게서 살아남은 132명...그중 78명, 국가는 행방조차 모른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82917140005515)
    2. • 자녀 살해, 아동학대 범죄로 못 박아야 아이들 지킬 수 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0211310000623)
    3. • '위험한 양육자'의 아동 학대...학교 병원 복지센터 누구도 나서 주지 않았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83115520004174)
    4. • 아동학대 의심스러운데 신고 머뭇거리는 이유...“보복 두려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83116020003114)
  3. ③ 벼랑 끝, 비극
    1. • 자녀 살해 후 자살은 심리적 자해...사회적 좌절이 정신건강 위기와 만날 때 '폭발'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82822450000084)
    2. • 자녀 살해 후 자살 사전에 막으려면...부모의 정신 건강 관리부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0116070001166)
    3. • 우리가 외면했을 뿐...엄마는 발달장애 아들과 늘 벼랑 끝에서 울고 있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82914410002081)
    4. • 위기가구 발굴로 부족한 자녀 살해 후 자살 대책...복지 문턱부터 낮춰야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0214370001403)
  4. ④ 처벌과 용서 사이
    1. • "오죽했으면? 아동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는 엄하게 처벌해야"[인터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0302060004562)
    2. • 자녀 살해 후 자살 10건 중 4건은 집행유예...진지한 반성, 유족의 탄원 등에 감형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83119050004186)
    3. • 아이를 죽이려 했던 부모가 법정에 섰다...피해 아이는, 가족은 용서를 바랐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83116170003260)
  5. ⑤ 상처를 넘어선 삶
    1. • "어머니를 가해자로 인정하기까지 20년이 걸렸다"[인터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1713550002925)
    2. • 자녀 살해 후 자살로 매년 20명 넘는 아이 잃는다…"아동사망검토제 이제 도입해야"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0515100000795)
    3. • 살기 서린 아빠의 눈, 그날의 상처 딛고...새순처럼 피어난 세 모녀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0311130005954)
    4. • "자녀 살해 후 자살 피해 아동, 집중 관리 사례로 지원해야"[인터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111458000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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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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