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 비밀의 방] 89. 무가내하의 슬픔-한선주 작가

최돈선 2025. 9. 1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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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이야기가 흐르는 전시장
그림 한 폭에 담긴 세계관 속으로
한선주 작가 ‘무가내하의 슬픔’ 연작 펼쳐
전시서 요릭에게 쓴 작가의 서간문 눈길
기다림, 죽음·삶에 대한 이야기 등 담겨
둘째 방 작품 ‘오필리어의 죽음’ 향유
작가 신화·노장철학·문학·음악 두루 섭렵
구도 단순화…공간·시간 무한 확장 가능
“그의 색채, 스며드는 은은한 한지의 색”
▲ 춘천문화재단의 예술소통공간 ‘곳’에 입주해 있는 한선주 작가의 작업 모습.

2022년 7월. 아내와 난 공지천 상상마당 전시장으로 갔다. 그날은 참 고요한 날이었다. 우린 아트센터 전시장 입구에서 작가 한선주를 발견했다. 그는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가 입구에 접근했음에도 한선주는 미동도 하지 않고 머리를 푹 숙여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입구 카운터에 놓인 브로슈어를 살며시 집어 들었다. 책을 읽고 있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Dearest Yoricke 친애하는 요릭에게

들여다보니, 이번 전시의 주제인 듯싶었다. 요릭은 셰익스피어 ‘햄릿’에 등장하는 어릿광대 해골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이 전시는 생명의 유한함에 대한 슬픔이 주제인데, 그 해골 요릭을 향해 햄릿은 “내가 수도 없이 입 맞춘 입술이여. 그대의 농담, 그대의 익살, 그대의 노래, 그대의 반짝이는 재담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라고 탄식한다.

인간은 죽음이란 슬픔을 겪는다. 해골 요릭은 죽음을 상징한다. 그 죽음에게 작가는 ‘밤의 서신’과 ‘새벽의 서신’을 띄운다. 물론 죽음의 요릭에게서도 답장을 받는다. 그러나 그 답장이 무엇인지를 관람객은 알 수가 없다.

그런 ‘알 수 없는 슬픔’을 한선주는 ‘무가내하(無可奈河)의 슬픔’이라는 테제로 연작을 이어오고 있다.

얼마나 흥미로운 전시인가. 나와 아내는 조용히 첫째 방 ‘밤의 서신’으로 들어섰다.

▲ 작업실에서 만난 한선주 작가

- 밤의 서신

“우린 영화 속에 들어온 거 같아요” 아내가 말했다. 전시장은 이야기가 흐르는 영화의 세트장 같았다. 등장인물은 요릭과 오필리어와 주인공인 화자(한선주 작가)였다.

방은 크게 세 가지로 배치되어 있었다.

심상음악인 비발디 ‘사계’ 중 ‘겨울’ 1악장 악보를 비롯해 코헨, 알레그린, 헨델, 베를리오즈의 악보가 걸려 있었고, 오브제인 성모상, 죽은 화살나무와 공작깃털들이 보였다. 작가의 작품 요릭과 관련된 ‘no, 너의 꿈속에서’ 외에 세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요릭에게 쓴 작가의 서간문이었다.

“안녕 요릭. 지난번 보내준 편지는 잘 받았어”로 시작되는 편지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기다림에 대한 글, 나훈아의 ‘땡볕’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 오필리아와 자신이 얼마나 천진했었는지에 대한 고백 등 ….

그림 전시에 은밀히 주고받는 이야기가 있다니…, 또 음악가의 악보가 뜻하는 것은? 소리는 없는데, 그 악보를 더듬어 소리를 들어보라는 작가의 능청은 또 무엇인가.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한선주 작가가 재현한 요릭의 해골 초상을 보고서일까? 아니면 썩은 과일이나 다 타버린 초를 보고서일까? 아니다. 무언가, 어떤 충격이, 답답한 내 영혼을 세차게 쳤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전시를, 나는 예전에 본 적이 없었으니까.

- 둘째 방의 새벽 서신

번뇌와 고통의 요릭과 나누는 ‘은밀한 대화’는 둘째 방에서 여명을 맞는다. 리히터 4계 ‘봄 1악장’으로 시작되는 서간문들, 윤동주의 시 ‘삶과 죽음’, 윌리엄 워즈워스의 ‘초원의 빛’이 서서히 다가올 여명을 알린다. 오브제로는 모래시계가 흐르고, LP레코트판이 소리 없이 돌고 있다(이것 또한 상상해야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오필리어다. 아니 오필리어의 죽음이다. 오필리어는 보이지 않고, 거의 연못에 잠겨가는 욕조가 있을 뿐이다. 한지에 아크릴과 파스텔로 그려진 그림은 흰 수선화와 목련, 버드나무와 녹색 풀들, 동그라미의 소용돌이를 그리는 물, 죽음을 축복하는 듯한 화사한 꽃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오필리어의 죽음’으로 하여 죽음은 비로소 안정감과 다른 차원의 태어남을 암시하는 것일까. 이 또한 나는 알 수 없다.

햄릿의 오필리어는 사랑, 불행, 고통을, 익사를 통해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일까. 나는 끊임없는 물음만 되뇔 뿐이었다. 아니다. 익사가 아니라 그냥 잠김이다. 어쩌면 영원한 아늑함의 세계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적인 욕조를 통해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하게 된다면, 그건 모태로의 회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이란 양수 속에서 가장 아늑하고 가장 행복하니까.

나는 또다시 무의미하게 이렇게 되뇔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의도하는 해법에 대한 물음, 죽음이 구원이 될 수도 있다는 암시를, 나는 그날 느끼고는 있었는지, 지금도 아리송할 뿐이다.

▲ 1. 한선주 작 ‘친애하는 요릭’ 2. 한선주 작 ‘오필리어의 죽음’ 3. 한선주 작 ‘至安(지안)’

- 한선주의 그림엔 문학이 있다

나는 2019년 가을, 약사천변 ‘터무니 창작소’에서 한선주의 그림을 처음 보았다.

저녁,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업고 언덕을 오르는 장면의 그림이었다. 제목이 ‘저녁에 꾸는 꿈’. 그저 평범한 듯한 그림이었지만 따뜻하고 쓸쓸하고 정겨웠다. 하늘에 걸려 있는 구름 두 점, 가로등과 흐릿한 언덕길,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는 집들…. 이런 어두워지는 저녁 풍경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린 날 나를 업고 가던 아버지의 등이 아련하게 그리웠다. 상실에 대한 그리움은 왠지 모르게 슬픔을 동반하지 않던가. 그건 아마도 한선주가 원초적 주제로 삼고 있는 무가내하의 슬픔이 물결처럼 닿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선주의 박사 논문에 따르면 자신의 작품 주제와 방법을 네 가지 테마로 구성해 놓았다.

상실의 슬픔이 주제인 ‘미슈테카의 노래’, 무한한 기다림의 연작, 바람 속의 먼지를 시각화한 작품들, 그리고 죽음의 상징인 해골 요릭과의 끝없는 대화.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은, 부처이든 성인이든 그 누구든 인간이면 품을 수밖에 없는 의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고뇌와 수행을 해 왔던가. 한선주도 태어남과 생명의 연속, 다음에 올 죽음에 대한 유한함, 이러한 인간의 숙명은 최후의 강렬한 죽음을 인식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무가내하의 슬픔이, 한선주의 내면에 잠재된 영혼의 동굴을 울렸을 터였다.

한선주는 신화와 노장철학, 문학과 음악을 두루 섭렵했다. 그는 읽었고, 썼고, 들었고, 보았고, 그렸고, 느꼈다. 그의 색채는 화려한 그림이 아니었다. 대상물에 덧칠하는 색이 아니라 스며드는 은은한 한지의 색이었다.

한선주의 그림엔 시가 스며 있고, 신화적 서사가 숨겨져 있으며, 한선주가 설정해 놓은 이야기의 시나리오가 톱니처럼 맞물려 펼쳐져 있다.

이러한 독특한 화가를 나는 작가 이외수를 통해 발견한 적이 있다.

한선주는 리얼하지 않으나, 매우 정치(精緻)한 건축가처럼 이야기 구조를 촘촘히 배열한다.

그의 그림이 나를 놀라게 하는 까닭은 구도를 매우 단순화한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그의 화면을 보는 이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그림 속 공간과 시간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림이 주는 어떤 신비한 힘이다. 나는 한선주의 그림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 ‘至安(지안)’이란 그림 한 점

한지에 수묵 채색의 그림 한 점을 보자. 배경은 하늘과 물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푸른 색이다. 이 그림은 대비가 아주 훌륭한 그림이다. 실과 허의 구조가 아주 단순하다. 하얗게 비워진 만월, 대문, 산이 전체 화면의 전부이다. 이 화면은 자신의 존재를 비추는 거울일까.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터이다. 지안이란 뜻처럼 ‘어떤 편안함에 당신은 이제야 이르렀는가’라는 물음밖엔.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한선주 #죽음 #슬픔 #작가 #요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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