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스럽지도 ‘소녀’답지도 않게 껄껄대며 웃었다[금요일의 문장]

고희진 기자 2025. 9. 18.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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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볼펜을 집더니 공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돼지들! 멱을 따도 할 말 없어. 고추가 잘려도 할 말 없어. 그러고는 배꼽을 잡고 미친 듯이 웃었다. ‘여성’스럽지도 ‘소녀’답지도 않게 천박하게 껄껄대며 웃었다. 구내식당의 다른 모든 테이블은 희미해지고 구석 자리의 우리 테이블만 사방을 환하게 비추며 공중으로 부양했다.” <제로섬> 수록작 ‘끈적끈적 아저씨’ 중, 하빌리스

전미 도서상, 페미나상 등을 수상한 고딕 문학의 대가 조이스 캐럴 오츠의 단편집이다. 총 열두 편의 소설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여성으로서 경험하게 되는 불안과 공포, 분노가 담겼다. 수록작 ‘끈적끈적 아저씨’는 거주 지역에서 여아 성매매가 이루어진다는 소문을 접한 어느 여고생 무리가 성매수자를 직접 벌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여성 대상 스토킹 문제를 담은 ‘상사병’,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이를 지켜보는 딸의 모습을 그린 ‘참새’, 엄마의 패륜적인 행동에 고통받는 아이를 다룬 ‘저 데려가세요, 공짜예요’ 등도 있다. 매년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는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가까운 관계가 도리어 상처를 입히는 삶의 아이러니 등 인간 내면에 깃든 어둠과 불안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불어 터져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시체처럼 쿰쿰”하다거나 “살아 펄떡이는 심장을 쑤시고 비트”는 것처럼 원초적이고 강렬한 문장은 여전하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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