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서도 고국 독립 꿈 실천한 ‘영원한 청년’
1911년 의학교 졸업한 이태준
도산 안창호 만나 신민회 가입
일제, 독립운동가 잡아들이자
사촌 처남 김규식과 몽골행
정착 이후 국왕 주치의로 활동
레닌 임시정부 지원금 운반 중
반혁명 러시아군에 피살 사망
올란바토르 이어 고향에 기념관


군북 석교천 부근에 2021년 지어진 '대암 이태준 기념관'이 있다. 몽골 울란바토르에 이태준 기념비와 가묘가 조성된 지 21년, 기념관이 세워진 지 15년 만이었다. 의사이면서 독립운동가였던 이태준은 몽골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다. 이태준은 갑신정변 1년 전인 1883년(고종 20)에 함안에서 태어나 1911년 세브란스 연합의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를 졸업했다. 1910년 이태준은 감옥에서 나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이던 도산(島山) 안창호를 만나, 신민회의 청년조직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한다. 양기탁·이동휘·이승훈·이회영·김구·신채호 등이 1907년 결성한 비밀결사조직 신민회는 애국계몽 운동은 물론 국외 독립군 기지 조성에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 청산리전투에서 활약한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가 신민회의 계획에 따라 설립된 학교이다.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세계의 이목은 프랑스 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강화회의의 평화원칙 가운데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면서, 식민지로 전락한 피압박민족들의 기대가 부풀었다. 그때 상해 임시정부를 대표한 이가 9개 국어가 가능했다는 부산 동래 출신의 김규식이었다. 김규식은 매제 이태준과 안희제의 백산 상회, 손병희의 천도교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1919년 2월 1일 중국 상하이에서 출발해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다. 김규식은 도착 즉시 '독립공고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고, 각국 대표단을 만나 한국 문제를 강화회의 안건으로 상정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던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외면으로 그는 회의 발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래도 김규식은 좌절하지 않았다. 삼균주의의 조소앙,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황기환 등과 함께 '임시정부 파리위원회'를 만들어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423회의 기사가 133개 프랑스 신문에 게재되도록 했다.
이 같은 임시정부의 대유럽 외교활동을 부럽게 지켜보았던 이가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다. 호치민은 김규식 등과 동지적 교감을 나누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베트남 독립운동의 모범으로 생각했다.

몽골에 정착한 이태준은 국왕의 주치의가 되는 등 신의(神醫)로 불렸지만, 독립운동의 꿈을 잊지 않았다. 1920년 여름 소비에트의 레닌 정부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 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을 지원하기로 하고, 1차로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를 한인 사회당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국제공산당) 파견 대표 박진순(朴鎭順)과 상해 임시정부 특사 한형권(韓馨權)에게 넘겨준다. 일곱 개의 궤짝에 담긴 40만 루블의 금괴는 무게만 350kg, 현재 화폐가치로 700억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1919년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기치로 내걸고 출범한 코민테른이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지원하는 차원이었다.
금괴는 안전을 위해 여러 경로로 나뉘어 운반되었는데, 이태준은 조응순과 함께 울란바토르에서 베이징까지의 운송을 맡았다. 1920년 가을 8만 루블 상당의 금괴를 전달한 이태준은 몽골로 돌아가기 전, 베이징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다. 당시 의열단의 가장 큰 고민은 폭탄의 품질 문제였다. 이태준은 김원봉에게 우수한 폭탄 제조 기술자인 헝가리인 마자르를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이태준은 코민테른의 2차 지원분 4만 루블을 운반 준비하던 도중에 볼셰비키 혁명정부와 내전을 벌이던 반혁명 러시아 군인들에게 피살당하고 만다. 그때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이태준의 약속은 그가 죽은 뒤에 기적적으로 지켜진다. 양지선은 논문 <헝가리인 마자르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과 그 의의>에서 마자르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의 포로가 되어 떠돌다가 이태준의 일을 돕게 되는데, 김산의 <아리랑>에 등장하는 독일인 폭탄 기술자 마르틴과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한다. 참사를 피해 탈출한 마자르는 1921년 베이징에 도착해 백방으로 김원봉을 찾았고, 이 소식을 들은 김원봉과 드디어 상봉하게 된다. 양지선은 이태준이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도 마자르가 김원봉을 찾아다닌 것은 헝가리 역시 한국과 같은 상황이어서 한국인 혁명가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정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이태준이 러시아 백군에게 죽고 몇 달 뒤,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몽골 울란바토르를 지난다. 그들은 1922년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주최한 '극동 인민 대표대회' 참석을 위해 가는 길이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인으로 위장한 상황이었음에도 이들은 몽골인들이 마련한 이태준의 가묘를 찾는다. 여운형은 나중에 <몽고사막 여행기>에서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기특한 헌신과 희생과 기념비"라고 기술한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1922년 '극동 인민 대표대회'는 그 직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려고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와 연관이 있다.

대회에서 김규식과 여운형은 의장단으로 선출되었다. '극동 인민 대표대회'는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가 체결한 '4국 조약'을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흡혈귀 동맹'으로 규탄하며,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성명을 채택했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최초의 국제적 성명이었다.

/김석환 박사·지식 큐레이터
☞ 필자는 KNN 사장, 한국인터넷진흥원장,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고인돌과 인공지능'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언론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콘텐츠와 한국 언론기업의 문제에서부터 산업혁명 이후 헤게모니를 둘러싼 세계와 한국의 근현대사, 생성형 인공지능, 플랫폼, 빅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