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여행자] 나는 비건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은정 기자 2025. 9. 18.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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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남부에는 ‘헵번 스프링스(Hepburn Springs)’라는, 왠지 친근하게 들리는 이름의 작은 온천 마을이 있다. 드넓은 하늘과 초원으로 가득한 이곳은 언뜻 평범한 호주의 시골 마을처럼 보이지만, 내게는 특별한 의미로 남아 있는 장소다

숲 속의 게스트하우스와 잘란

내 생애 첫 해외여행은 한 달간의 짧은 유럽 여행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삶의 방향을 '여행'으로 정했고, 학교를 마치자마자 호주로 떠났다. 호주 생활 초반에는 유기농가에서 일하며 숙식을 제공받는 우프(Wwoof)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우프 주소록을 뒤적이다가 빅토리아주 멜버른 근처 시골 마을에 위치한 '컨티넨탈 게스트하우스(Continental Guesthouse)'라는 숙소를 발견하게 되었다.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곳에서 생활하실 우퍼 여러분은 채식을 하여야 합니다. – NO MEAT, NO EGG, NO MILK!"

그곳에서는 완전 채식주의자, 즉 비건(VEGAN)으로 지내야 했다. 사실 호주로 떠나기 직전, 우연히 신문에 실린 책 소개를 통해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읽었는데, 그 책이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내가 채식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살 빼려고 그러느냐"며 핀잔을 주셨지만, 같은 해 결국 운명처럼 헵번 스프링스로 오게 된 것이다.

멜버른에서 기차를 타고 헵번 스프링스 역에 내리자, 낡은 푸른색 자동차에 기대 서 있던 단발머리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마을이라 내리는 승객이 거의 없었기에 우리는 금세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갈색 코르덴 바지를 입은 긴 다리의 그는 자신을 '잘란'이라고 소개했다.

잘란의 낡고 빈티지한 자동차를 타고 산길을 오르자, '컨티넨탈 게스트하우스'라는 나무 간판이 달린 하늘색 목조 건물이 나타났다. 을씨년스러운 숲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황량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깊은 숲 속, 드문드문 집이 흩어져 있는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건물. 나는 알록달록한 벽지로 채워진 작은 방을 배정받고, 곧잘란과 함께 숲을 거닐었다.

그곳에서 내 일은 게스트하우스 청소와 마당의 잔디 깎기였다. 추운 날씨 속에 옷을 겹겹이 껴입고 거실 모닥불을 지피고, 먼지 쌓인 레코드판을 닦고, 바닥을 윤이 나게 닦아냈다. 그리고 내 키만큼 자란 잡초를 무겁고 거대한 구식 잔디깎이로 밀어내야 했다. 몇 줄만 지나도 온몸의 힘이 빠져 잔디 위에 드러눕곤 했고, 언덕을 오르내릴 때면 멀리 보이는 잘란의 집 불빛을 애처롭게 바라보기도 했다.

떠남, 그리고 시작

주말이 되면 잘란이 내 방문을 두드리며 벼룩시장에 가자고 했다. 그리고 내 손에 10달러를 쥐여주며 "필요한 음식을 사라"고 했다. 헵번 스프링스에서 차로 10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큰 마을 데일스포드에서는 벼룩시장이 열렸다. 각종 앤티크 물건과 직접 만든 빵, 꿀, 잼이 가득했고, 풍성한 과일과 히피 풍의 옷이 사람들을 유혹했다.

히피풍 차림을 한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긴 곱슬머리를 풀어헤치고,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화려한 옷차림으로 자유롭게 웃고 떠드는 그들의 모습은 낯설지만 동시에 부러웠다. 그들의 자유와 자연스러움은 숲 속 마을과 완벽히 어우러지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매주 토요일 채식 요리 교실, 일요일 채식 뷔페가 열렸다. 그리스계 아버지를 둔 히피 요리사 알렉시스는 긴 이름만큼이나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우유, 계란, 고기를 쓰지 않는 비건 요리를 유쾌하게 가르쳤다. 특히 김치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난주 한국인 우퍼가 김치를 담아 땅에 묻어놨다"며 곧 맛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요일 뷔페는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자리였다. 마을 주민과 여행자가 모여 와인을 나누고 소소한 이야기를 이어가는 채식 파티는 작은 축제 같았다.

그곳에서의 겨울은 차가웠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그리고 마침내 떠나야 할 날이 다가왔다. 아침에 잘란은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진 얇은 잡지 한 권을 건넸다. 표지에는 큼직하게 'VEGAN'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기차에 올라 멀리서 손을 흔드는 그의 긴 다리를 바라보며 잡지를 펼쳤다. 영어 단어는 낯설고 어려웠지만, 꼭 읽어내리라 다짐했다. 사전을 곁에 두고 한 장 한 장 읽어나간 끝에, 마음속에 새로운 결심이 자리잡았다. 이제는 내 의지로 채식을 시작하겠다고.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내가 알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강제로 시작된 채식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호주에서 채식을 만난 이후, 지금까지 나는 비건으로 살아가고 있다.

채식은 억지스러운 선택이 아니라 내게 다가온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덕분에 내 삶은 단순해졌고, 조금 더 행복해졌다. 그리고 그 단순함 속에서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글쓴이 최윤성 '망고 요가 트래블'의 1인 여행 기획자. 국내외 요가 여행을 진행하고, 틈틈이 산티아고 순례길 인솔을 한다. 겨울에는 인도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만들며 생활하는 여행자로 살고 있다. 

하은정 기자 hah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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