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현 가능성 낮은 ‘무제한 통화스와프’… 한미 통상 협상, 원점으로 가나
하이 리스크 카드로, 통상 협상 주도권 노리나

최근 미국 뉴욕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고위급 통상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현재 협상 진행 상황에 대해 “아직 많은 것들이 유동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 장관은 16일 세종시 한 식당에서 진행한 출입기자간담회에서 “‘이게 말이 돼?’라는 안을 미측이 내놓는다. 우리가 제안하는 안에도 (미측이 봤을 땐) 불합리한 안이 있다. (이러한 안이) 터프하게 오가고 있다”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김 장관이 언급한 ‘미측이 봤을 때 불합리한 안’은 최근 한국이 미측에 제안한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3500억달러(한화 486조원) 규모의 대형 투자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외환위기를 예방하는 안전장치로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제안했지만, 미측이 수용할 가능성은 매우 작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의 무제한 통화스와프 제안을 ‘미국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해, 협상 주도권을 확보하고 투자 조건을 조정하려는 전략적 카드’라고 분석했다.
17일 기획재정부 등에 대한 취재를 종합하면 한국과 미국이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기 위해선 4자간 협의가 필요하다. 한국에선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 미국에선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가 합의를 해야 한다.
미 연준은 현재 유럽연합(유로화)과 영국, 일본, 스위스, 캐나다 등 5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 대해선 경제 위기 등 비상시로 한정해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기축통화국이 아닌 나라와의 통화스와프는 달러화 유동성 부족으로 인해 금융위기 발생 가능성이 있고, 이러한 파급 효과로 미국 경제가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진단이 나올 때 이뤄진다.
과거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과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였던 지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00억달러, 코로나 팬데믹 시기였던 2020년부터 2021년까지 600억달러 규모로 총 두 차례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 정부가 제안한 안은 경제위기와 관계가 없으면서도 규모는 무한대인 ‘무제한 통화스와프’다. 원활한 산업 투자를 목적으로 양국의 중앙은행이 통화스와프를 체결할 가능성은 낮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와 연준 간의 갈등도 통화스와프 체결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국채 이자 부담 완화와 경기 부양을 위해 기준 금리 인하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지만, 연준은 물가 상승을 우려하며 신중하게 대응하고 있다.
연준 이사진에 대한 인사 압박도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준금리 인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을 연일 비난하며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7명으로 구성된 연준 이사진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우기 위한 압력도 행사 중이다. 지난달엔 전임 바이든 행정부에서 임명된 리사 쿡 연준 이사에 대해 주택담보 대출 사기 혐의를 제기하며 해임을 시도했으나, 법원의 결정으로 불발했다.
트럼프 행정부와 연준이 강하게 충돌하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제안한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이 한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체결할 가능성은 극히 작다”라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받겠다고 해도, 연준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현재의 미국 정치·경제 상황을 봤을 때, 연준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규모 스와프는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연준이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일각에선 정부가 미국이 수용하기 어려운 안을 제안해 협상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한 전략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한국의 외환 보유고의 85% 수준인 3500억달러를 짧은 시간에 투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미측에 주지시키고, 현금성 투자 규모를 줄이는 전략이란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는 미국이 제도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핑계로 관세 협상을 원점으로 돌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언급한 것은 명분일 가능성이 있다”라면서 “‘관세 25%를 내고 버티자’의 빌드업을 하고,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25% 관세를 맞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석병훈 교수도 “무제한 통화스와프 불발을 이유로 통상 협상을 원점에서 재논의하는 방안도 충분히 가능한 카드”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전략이 무모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통화스와프를 안 해주면, 우리도 투자할 수 없다’는 식으로 가는 건 너무 위험한 전략”이라면서 “통화스와프를 한도를 설정해 체결하고, 연간 투자 규모를 통화스와프 규모 이내로 설정하는 대안이 있다”고 했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도 “3500억달러 투자와 관련해 기간을 정하진 않았다. 미국에서 일시불로 내라고 해도, 우리가 한번에 줄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라면서 “통화스와프를 연간 300억달러 규모로 체결하고, 이 한도 내에서 장기적으로 투자를 진행하는 방안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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